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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
올 한 해도 어스름으로 접어든 시간이다. 어둠이 짙어져 밤이 깊어지면 또 한 해를 맞이할 여명을 기다리게 된다. 쾌활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으로 기억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지만 세상의 촉감은 자주 바뀐다.

 올 한 해는 친정 모친의 노환으로 몸도 마음도 아프고 힘들었다. 어머니 떠나고 난 후 내 마음 편하자고 이러는 것은 아닌가. 간병에 지치면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다. 먹은 나이만큼 몸도 삭았는지 오가는 거리가 만만치 않아 과부하 온 몸이 자주 아팠다. 그래도 엄마를 보고 오면 마음이 편하고 까실한 엄마의 손을 잡고 있으면 어린아이마냥 천진해졌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우연히 보게 된 날, 이 화가는 고립과 외로움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영험한 힘을 가졌구나! 글이 주는 감동 이상이라, 호퍼의 그림을 탐독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 불안과 쓸쓸함이 번져, 공허하고 외로운 공간에 배경처럼 앉아 있었다. 이 화가가 누구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려 애쓰지 않았는데 그가 그린 화면 속의 여인은 강렬한 공감으로 나를 잡아 끌었다.

 남루해 보이지는 않지만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 여인이 홀로 그의 화폭을 채우고 있다. 정면으로 얼굴을 들어 세상과 대결하지 못하고 살짝 숙인 모습이 숙연하고,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은 피로감으로 무거웠다. ‘아침 햇살’, ‘자동판매식 식당’, ‘호텔 방’, ‘293호 열차 C칸’, ‘밤샘하는 사람들’. 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와 소설 작품이 많은 것을 보면 호퍼의 그림에 빠져든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이 됐다. 현대의 고독과 단절을 조명처럼 사용한 빛으로 절명하게 표현한 작품에 빠져 생각에 젖다 보면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는 날빛이 사그라진 밤이거나 저무는 중의 시간이다.

 혼자 떠났다 무작정. 안전한 잠자리를 위해 호텔을 찾았고, 침대 시트 속에 웅크리고 누웠다. 고치 속에 들어 있는 번데기처럼 몸을 말아 겹겹이 비상의 직조를 짰다. 어색한 낙관론은 집중이 되지 않아 신기루마냥 아득하기만 했다. 불 꺼진 실내가 윙윙거리는 환청으로 불편하더니 이내 두꺼운 커튼 밖 세상의 소음이 들이닥친다. 온전히 그림 속의 그녀와 동화가 안 된다. 단절도 고독도 먼 사치처럼 느껴졌다. 사면에 드리운 고립감조차 내 것으로 즐기지 못하다니……. 조급증이 나고 무엇이 문제인지 까칠한 반응이 나온다. 온전히 혼자이고 싶어 내가 나만 바라볼 수 있기를 소원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내 의지 빈약을 놀리는지 도무지 도와주지 않는다.

 내적인 사유가 깊어지면 머리와 가슴이 부딪히고 둘 중 하나는 과부하로 굳어버린다. 떠나왔으니 안달하지 말고 낯선 풍경 속에 나를 내려놓자. 그러면 도움 받을 일도 생길 것이고 긴장이 풀어져 내 따뜻함도 상대에게 보일 것이다. 시간의 질은 개인의 몫이고 평가도 결국은 내 마음 내키는 대로인데 기대보다 좋지 않았다고 마음 상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해 본다.

 낯선 나라를 탐색했다. 모르는 길을 따라 상점을 지나고 주택가를 지나고 바닷가를 거닐고 하루를 어슬렁거리며 보냈다. 하루 또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불어 혼자 떠나온 시간은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그들이 누구인지 나만 궁금했다. 마주치는 사람, 그 중에서도 여자 백 명쯤 인물평을 해보자고 수첩에 메모를 했다. 관광 명소에서도 커피숍 창가에서도 식당에서도 하루를 마감한 잠자리에서도, 나는 내 상상을 보태 그녀들을 저장하느라 분주했다. 여인1 여인2 여인3……. 내 삶의 조연으로 그녀들을 끌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보이는 외양만으로 부당한 역할을 맡았을지도 모르는 그녀들은 떠들썩하게 혹은 헛헛하게 살아났다.

 오후 3시쯤인 햇살 아래서 가끔은 강렬한 풍경을 만났고 어둠 내밀한 밤 11쯤에서야 동색으로 안정돼 편안해진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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