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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남석 인천시 연수구청장
지방자치를 흔히 ‘풀뿌리 민주주의’로 부른다. 수없이 많은 잔뿌리처럼 소소한 현안부터 주민생활까지 폭넓게 포용하는 ‘대중적 민주주의’와 통하는 의미다. 1935년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간접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으로 시작된 이 말은 바꾸어 해석하면 주민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면서 민주 정치가 훈련되고 실현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험난한 과정과 책임이 따른다는 얘기다.

 올해부터 연수구가 기존 주민참여 예산뿐 아니라 본예산도 편성 단계부터 정책사업별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광폭행보를 시작했다. 제안 수렴 수준의 예산편성을 넘어서 소단위 자치분권을 실행하는 현장형 주민참여예산제다. 구민이 낸 주민세 전액을 동(洞) 단위 마을 재정으로 배정해 예산의 전 과정을 주민 스스로 결정 운용하는 방식이다. 의견수렴을 통해 이미 지난달 95억 원을 주민참여 예산 재원으로 확정해 13개 동 실링예산 55억 원, 전체 동 포괄사용 예산 24억 원, 구 주민참여 예산에 15억 원 등을 배정했다.

 본예산도 시작부터 현장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 정책 사업별로 한 달간 10차례의 실국별 주민토론회를 열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11개 분야로 나눠 치열한 내부 토론 과정을 거쳤다. 책임과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이야 당연한 과정이지만 정책사업별 주민토론회를 통해 실과별로 의견을 반영하기는 처음이다. 작은 변화지만 스스로 시험대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그 결과 최근 민관협의회를 열고 본예산과 추경을 포함해 65억9천218만 원으로 65건의 구·동·토론회 주민제안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완료사업 7건(5.4%), 비예산사업 11건(8.55), 재검토 22건(17%), 부적합 25건(19.2%)을 제외하면 전체 주민제안 사업의 절반을 반영한 수치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지방재정법 개정으로 2011년 처음 의무화 되면서 지자체마다 많은 변화와 시련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획일적 재원 배분 방식 때문에 나눠 먹기식이라는 비난도 받았고, 운영 평가 기준인 주민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많았다. 일부에선 주민 의견만 개진하고 예산 편성은 지자체가 결정하는 구조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집행부가 주도하는 형식적 주민 의견수렴 과정도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됐다. 결국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 의지가 성패를 좌우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주민참여 제도인 ‘타운미팅제도’가 그렇듯이 해외에서도 주민의 참여가 도시를 변화시킨 사례는 많다. 브라질 포트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도 있고, 민원을 시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한 시민배심원제가 그렇다. 성숙된 민주주의는 현명한 의사 결정을 필요로 하고 이를 위해서는 주민들의 충분한 정보와 학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경험치를 자양분 삼아 중앙 정치도 발전해 나가기 때문이다.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경험치가 도시를 바꾸는 든든한 힘이 되는 이유다.

 민선 7기 출범과 함께 연수구는 인천형 지방분권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보다 내실 있는 민간참여형 협의회 구성을 위해서도 고민해 왔다. 예산도 초기 단계부터 현장의 목소리를 충실히 반영하고 분야별로 주민과 관계자들의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과정도 지속적으로 이어갈 예정이다. 때 맞춰 정부도 지난달 지방자치의 날을 맞아 자치단체의 자율성 확보를 위해 30년 지방자치법을 전면 개정키로 했다. 시·도지사에게 있던 의회 사무직원 임용권을 의장에게 넘겨 의회사무처 운영의 독립성을 보장토록 했다. 실질적인 지역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주민이 의회에 직접 조례를 발의할 수 있는 ‘주민조례발안제’도 도입한다.

 이제는 주민의 역할이 중요할 시기다. 예산이 어떻게 배분되고 집행되는지 살피고 주민 스스로 당당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지속적으로 축적된 경험치를 활용해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역할도 반드시 필요하다. 민생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왜곡 없이 담아낼 수 있는 도시가 바로 주민들이 꿈꾸는 미래도시이기 때문이다. 풀뿌리가 양분을 흡수해 올바른 식물 성장의 필수적 존재가 되듯 도시를 바꾸기 위해서는 주민의 경험치만큼 핵심적인 에너지는 없다. 경험이 혁신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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