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바르게 처리해 사사로운 이득이 없도록 하는 것을 공평무사(公平無私)라고 한다. 또 하는 일이나 태도에 사사로움이나 그릇됨이 없어 정당하고 떳떳하다는 공명정대(公明正大)도 같은 말이다. 하지만 남보다 사익을 더 많이 취해야 하고 그릇되더라도 사사롭더라도 ‘결과’라는 성과물을 얻기 바쁜 인간사에서 이 같은 가치관은 책이나 액자 속에서나 존재한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내면서 이런 가치관을, 비슷한 삶의 태도를 지닌 인물을 만나거나 제3자를 통해 이런 인물이 ‘실존’한다고 확인된 적은 없다.

 차라리 이런 사자성어나 귀한 말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 사익 추구에 열을 올리다 짧은 생을 마감하는 우리네 인생이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시간에 또 다른 사익의 추구에 골몰하면 새로운 사익을 창출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사태’로 시작된 가부장적·군사문화적 권위주의 시대의 균열은 여기저기서 기회와 분배, 남녀간의 공정과 공평이라는 삶의 가치관과 태도에 우선권을 부여하려고 몸부림이다.

 권위주의의 종말이 아닌 겨우 ‘작은 균열’이 하나 생겼는데도 말이다. 기득권이 가진 권위주의 시대의 종말은 인류의 종말이 와야 가능한 얘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쥔 몫을 스스로 내려 놓는다는 상상은 저승에서나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작은 균열로 생긴 이 공정무사의 틈은 어떻게 메울까. 손쉬운 방법이 있다. 100이라는 가상의 숫자를 만들어 놓고 당신과 내가 50대 50으로 나눠 갖는다고 현혹한 뒤 주입하는 것이다. 똑같이 나눠 가졌다고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일종의 세뇌 수법이다. 50대 50으로 나눠 가졌는데 어떻게 이게 현혹이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100을 세분화해서 기득권은 평소 가진 것들 중에 좀 줄여서 50에 담고, 피기득권이 가져갈 목록은 최대한 부풀려 50에 담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수치적으로 반반씩 나눠 갖는 공정과 공평이 성립된다.

 이를 근거로 기득권은 피기득권에게 ‘너와 나는 평등하고 공정한 공동운명체’라고 설득한 뒤 새로운 한 시대를 다시 지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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