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jpg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중구 전동(錢洞)은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1903년 8월 개항장 일대에 부내면을 신설했고 1907년 5월 동명을 고칠 때 오늘날의 전동 일대는 전동(典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곳이 조선의 화폐를 발행했던 전환국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고유의 지명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 전동은 산근정(山根町, 야마네마치)이 됐다. 러일전쟁 때 병참사령관이던 야마네 다케스케(山根武亮)의 이름을 땄던 것이다.

 광복 후 어떠한 연유였는지는 모르나 돈 ‘전(錢)’자 전동(錢洞)으로 변했으니 아마도 돈을 찍던 곳이 강조돼 ‘돈마을’이 된 듯하다.

 개항기 조선 왕조는 국내외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 대원군 집권기(1863~73) 국가 제반 정책 성향은 과단성 있고 혁신적이었으나 여기에는 개혁에 필요한 엄청난 국가 예산이 수반돼야 했다. 개항 전의 제반 정치· 경제적 혼란과 서구 열강의 조선에 대한 문호개방 요구는 군대를 증강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의 국방 정책 강화에도 많은 재원이 필요하게 됐다.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도 난제였다.

 개항기에 주로 유통됐던 화폐는 상평통보(常平通寶)였는데, 대원군 집권 3년 만인 1866년 상평통보보다 100배의 가치를 지닌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해 재정에 충당코자 했다.

 당백전은 화폐 단위가 너무 컸기 때문에 큰 상거래에서는 가능했지만 일반인들의 거래에서는 유통력을 갖기 어려웠다. 결국, 당백전의 대량 발행으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은 일시적으로 달성했으나, 주조사업을 착수한 지 5개월여 만에 중단되고 이어 유통마저 금지됐다.

 1876년 개항 이후 만성적인 재정난 속에 해외 사절 파견비, 부산·원산·인천의 개항비, 신식 군대 창설비 등 새로운 재정 지출로 극심한 재정 압박을 받게 됐다. 1883년 정부는 한정된 주조 원료를 갖고 보다 많은 유통 가치를 만들어 국가재정에 충당할 목적으로 당오전(當五錢)을 주조해 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임시로 만든 주전소에서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충분한 액수의 화폐를 만들 수 없었고, 또 돈을 만드는 일은 이윤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1888년 근대적인 화폐를 만들 기관인 전환국을 설치하고 경성전환국이라 했다.

 경성전환국은 7년 만인 1892년 인천으로 옮겨졌다. 경인선 개통 이전이기 때문에 운수교통이 불편하다는 표면적 이유도 있었지만, 일본의 지원하에 전환국을 쇄신하는 과정에서 인천은 서울보다 일본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은화, 백동화, 적동화, 황동화 등을 주조했는데 주로 ‘두돈오푼’이라 새겨진 백동화를 위주로 발행했다. 현재 50원 주화 크기의 흰색 동전은 그 공정이 비교적 단순하고 25배의 가치에 비해 제조 비용이 낮아 이익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때 인천전환국에서 제조된 동전에는 대조선개국오백일년(大朝鮮開國五百一年)이라는 국호와 연기가 표기됐다. 그러나 조선에 주재관으로 와 있던 청나라의 위안스카이(遠世凱)는 "청나라는 대국이고, 조선은 소국인데 대조선이라는 것은 국격상 체모에 불합하다"라 간섭하며 ‘대(大)’자의 제거를 요청해 개국 502년(1893)과 503년 제조된 화폐에는 ‘대’자가 제거돼 발행되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후 ‘대조선’이라는 국호가 다시 사용됐다.

 1900년 대일차관으로 인천전환국 확장 공사가 한창일 무렵 고종은 전환국의 용산 이전을 결정했다. 러시아인 알렉세프를 재정고문으로 임명하고, 일본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인천전환국을 폐지했던 것이다.

 인천 전동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백동화는 남발과 위조로 인해 정부가 세금으로도 받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고 1908년 12월에는 통용이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조개(貝)부터 시작된 화폐의 역사는 이제 세계 각국이 동전 없는 사회, 더 나아가 현금 없는 사회를 구현하려 하고 있다. 머지않아 동전을 주조했다는 말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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