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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일이나 사람 때문에 속이 상하거나 심지어 분노를 삭이지 못할 때 음미해 볼 만한 글이 있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에 소개된 막스 에르만의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라는 시가 그것입니다.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만원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늦어지자 친구는 여종업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 /무시를 당한 여종업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난 지금 그 친구의 무덤 앞에 서 있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는데 그는 이제 땅속에 누워 있다. /그런데 그 10분 때문에 그토록 화를 내다니.’

 시인이 말하는 ‘친구’가 저였음을 고백합니다. 별일도 아닌 일에 ‘버럭’ 화를 냈고, 생각이 다른 것뿐인데도 ‘옳고 그름’으로 논쟁을 일삼곤 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늘 정의롭다고 착각했고, 이 착각의 결과는 다툼으로 이어지고 결국 적대적 관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있는 ‘내’ 모습이 ‘진실한 나’의 모습은 아닐 텐데, 왜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거울을 통해 나를 볼 수 있듯이, 알다가도 모를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음을 다룬 책들을 접하면서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를 통해 나를 보기’였습니다. ‘너’가 바로 나를 볼 수 있는 ‘거울’이었던 겁니다. 다음의 예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나’는 허름한 동네의 뒷골목을 걷고 있습니다. 곳곳에 쓰레기가 넘쳐납니다. 악취도 심합니다. 이때 갑자기 가래가 끓어오릅니다. ‘나’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가래를 뱉습니다. 또 다른 어느 날입니다. ‘나’는 고급 호텔의 로비에 있습니다. 대리석 바닥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있어 걷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입니다.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깔끔한 옷차림에 몸가짐도 단정합니다. 이때 가래가 끓어오릅니다. 그러나 가래를 뱉을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나’였고 똑같은 ‘가래’였음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로 가득한 골목길에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가래를 뱉었지만, 깨끗한 호텔로비에서는 가래를 뱉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나’는 골목길이 지저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가래를 뱉을 수가 있었고, 호텔로비는 깨끗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뱉지 않았을 겁니다. ‘나’의 관점에서 골목길과 호텔로비를 ‘더럽다’와 ‘깨끗하다’라고 판단했고, 그렇게 판단한 대로 내 행동을 결정했던 겁니다.

 이번에는 관점을 바꾸어서 생각해봅니다. 나는 쓰레기로 가득 찬 ‘골목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갑자기 내 몸에 가래를 뱉는군요. 무척 자존심이 상할 겁니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어렵겠지요. 이제 ‘나’는 반짝반짝 광이 나는 고급스러운 호텔로비의 대리석 바닥입니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오갑니다. 가래를 뱉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를 밟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인격을 갖춘 품격 있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에서 내 자존감은 무척 충만해집니다.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내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알 듯 싶습니다. ‘너’가 내게 던지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나만 모르던 나의 실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네가 거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내’ 모습이 더러운 골목길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너의 행동을 탓하며 버럭 화를 내곤 했던 겁니다. 나에 대한 너의 거친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나의 삶을 ‘쓰레기’에서 ‘대리석 바닥’으로 바꾸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막스 에르만이 자신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지혜 중 하나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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