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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구리시 아차산에 아단성터가 있다. 아단성의 모습은 말굽형으로 토성이다. 백제·고구려·고려는 아단성, 신라는 아진함성, 조선은 아조성이라 불렀다. 북한산, 남한산, 웅진, 부여토성과 같은 백제식 토성이다. 아단성에서는 낙랑의 형식과 같은 백제 기와들이 많이 출토됐다. 적에게 정확하게 적중할 수 있는 화살의 괘구, 군영, 봉수대의 터도 있다. 조선시대 동쪽 방면 1단계 코스인 아단성 봉수대는 함경도 경흥의 서수라보 우암을 기점으로 해 24곳을 거쳐온 신호를 받아 서울 남산으로 보내는 봉수대였다.

 아단성의 동쪽 방면은 완만히 경사지고 서쪽 방면은 심하게 경사져 있어 서울, 인천 방면에서 공격해오는 적들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방어막 역할을 하고 있어 상시 백제 왕도 한성(남한산)의 중요한 방어진지였다고 한다.

 자료를 보면 아단성은 군사적 요새지뿐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단성터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면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옛적 유일의 교통수단이었던 광진리 나루터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한강하류와 서울과 원산으로 갈 수 있는 왕십리가 훤히 보인다고 했다. 동남쪽으로 바라보면 남한산이 우뚝 솟아 있고 서북쪽으로는 북한산이 구름 위로 솟아 있어 아단성 성터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어 구리시의 역사관광자원이다. 백제 책계왕 때 서기 286년 당시 백제의 도성은 남한산성 북쪽 기슭에 자리한 궁천리 부근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범이 염려돼 아단성을 수리하며 최후의 방어진지로 관리하고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새지로 여겼던 아차산 아단성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서기 396년에 함락당한다. 남한산, 북한산, 아차산의 군사적 요새지를 두고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치열한 군사작전이 벌여졌던 것이다.

 서로가 뺏고 뺏기는 군사작전이 반복되었던 곳이다. 백제 왕도였던 남한산은 서기 474년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다시 함락당하고 백제 개로왕을 비롯해 군인 민간인 포로 모두를 아차산으로 끌고와 개로왕과 군인들을 살해하고 백제 민간인 1천여 명을 부여로 귀향시킨 일도 아차산에서 있었다. 고구려 평원왕 때 서기 559년 신라가 남한산과 북한산 부근까지 신라의 영역이 넓혀지자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분개해 신라의 영역을 뺏으려 아차산에서 신라군과 대격전을 벌이다 숨진 곳도 아차산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북한산에 올라 위례성은 말갈족과 낙랑의 침략에 염려가 있으니 안전한 도성을 새롭게 축성해야 한다는 지시에 남한산에 성궐을 축성하고 환도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2022년 전이다.

 삼국의 치열한 군사적전이 펼쳐졌던 아차산의 아단성도 이 시기에 백제가 축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차산에 구리시가 2021년 개장을 목표로 고구려 역사공원을 조상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아차산에는 광개토대왕의 동상과 대왕의 비석도 복제해 2008년도에 조성해 놓았다. 백제, 고구려, 신라의 치열한 군사작전이 있었던 군사 유적지에 고구려의 상징성만을 두드러지게 부각하려 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온조왕, 책계왕, 개로왕,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장수왕, 신라의 진흥왕 등이 아차산의 아단성에 오랜기간 머물렀다.

 아단성을 복원하고 홍보하는 것은 구리시의 특색있는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다른 도시에서는 구상할 수 없는 삼국시대 군사적 스토리가 있는 아단성을 복원해 아차산 군사 관광지로 조성하는 것은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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