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일은 그동안 여물지 않은 채로 위선적이었다. 과학과 현실을 들먹거리며 합리성의 이름으로 거침없이 새것들을 이식했다. 철학과 역사학, 기하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온갖 수사(修辭)로 덧칠한 첨단화를 쉼 없이 잇댔다. 그 공간에서 생애는 자족할 수 없었다. 그 터를 지배한 생명들은 더불어 아늑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것들을 살아가게끔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살수록 풀리고 펴져야 할 생활은 고단하고 쓸쓸했다.

 개항 이래 이 땅에 세워진 주택과 빌딩, 마을과 도시들은 자연과 인간을 저버렸다. 옛것의 고결함은 굴착기에 뭉개졌고, 훗날의 귀중함은 콘크리트에 매몰됐다.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에 스스로를 결박했다. 나사인 듯 톱니처럼 일해서 겨우겨우 버텨 가는 가냘픈 생애는 밋밋하고 메마른 공간 속으로 그렇게 흘러갔다. 아등바등 눈물겹게 아파트 한 칸을 장만하고 나서 한평생 숨 돌릴 틈 없이 은행 빚과 이자에 치이는 군상들의 시린 속에서 찬바람이 인다.

 거기에 갇힌 인정(人情)에 무슨 빛깔이 돌고, 어떤 향기가 배어 있으랴. 삶은 끝내 볼품없이 앙상하다. 본디 우리네 살림집은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인 민짜 아파트와 달랐다. 단면의 연속이거나 평면의 누적을 곁눈질하지 않았다. 지붕의 기복과 대들보와 서까래가 빚어낸 입체공간에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더께와 깊이를 녹여 냈다.

 우리의 옛집은 새것을 민망하게 여기고, 번득이는 것을 부끄럽게 삼는다.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들뜬 화려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조건만을 가지런히 추려서 단출하고도 겸허하다. 검박하지만 남루하지 않고, 여유롭지만 넘쳐나지 않는다. 단순성이 거기에선 위대함으로 빛난다.

 우리의 오래된 집은 늙음의 형식 속에서 새로움의 내용을 빚어낸다. 서늘한 우물과 속 깊은 땅이 우려낸 물의 관계가 그렇고, 어두운 아궁이와 하늘로 오르는 불의 인연이 그렇다. 우물 속의 물과 아궁이 속의 불은 언제나 싱그러운 신생의 원소들이다.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물은 아파트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익명성의 물과는 다른 질감이여서 사람 쪽에 더 가깝다. 아궁이의 불길은 땅 밑 고랑을 따라서 흐르다가 굴뚝의 연기가 돼 하늘로 오른다. 사윈 불길은 구들장에 온기를 남기고, 사람들은 그 위에서 자식을 낳고 키운다.

 옛 마을은 어떤가. 집들은 서로 똑바로 마주하지 않고 어슷하게 비켜서 있다. 이 적당한 외면은 제가끔의 존재를 서로 아끼려는 화해의 방편이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욕망을 비스듬히 껴안고 가는 자를 가여워하는 삶의 품격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마을의 길들은 구부러져 있다. 가파름을 피해서 산의 여린 곳을 골라서 굽이굽이 돌아 마침내 산맥을 넘는 길의 원형처럼….

 마을의 휜 길은 공간을 구획하고 차별화하되, 격절시키거나 제거하지 않는다. 이쪽과 저쪽을 갈라서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충돌을 부르지 않는다. 그 길은 소통의 기능을 완성한다. 세상을 맞이하는 사회화의 공간으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도약의 통로로 소임을 다한다.

 늙은 마을에선 새로운 날에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는다. 아침에는 아침의 이야기가, 봄에는 봄의 이야기가 그득하다. 삶 속에서 끝없는 이야깃거리가 피어 오른다. 이야기 속에는 가난과 슬픔이 있고, 희망과 그리움이 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가르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배운다. 여기가 바로 세상이고, 삶의 속살이다. 옛 살림집과 오래된 마을의 아름다움은 이제 액자에 담긴 그림처럼 생활과 멀어져 있다. 상실의 어두운 그림자에 포개진 그리움의 흔적들이 가물거린다.

 기해년(己亥年) 새해 아침, 기호일보는 아름다운 늙은 마을의 그림을 다시 삶 속으로 끌어내려 한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그리운 것들을 향해 달려가고자 한다. ‘더불어 사는 세상, 함께 만드는 우리 동네’라는 깃발을 부여잡고 비록 오늘의 빈곤이 가슴 아플지라도 옛 마을들을 기웃거릴 것이다. 이 아픔 속에 더 좋은 미래가 있다면 무릎걸음이라도 기어이 가겠다.

 아름다운 힘이 팍팍한 현실을 개조하는 그런 세상을 보고 싶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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