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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겸 시인
서울역이나 수원역 인근 어느 지하계단을 내려가다가 누구든 본적이 있을 것이다. 오체투지하듯 계단 바닥에 엎드려 두 손바닥을 벌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것도 아기를 홑포대기에 둘러업고 아기 발이 벌겋게 얼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동정심을 자아내어 동냥질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옆을 지나치고 있지만 대부분 무심한 듯, 그리고 안 속는다 하며 그냥 스쳐 지나간다. 그럴수록 빈 깡통 속에 떨어지는 따뜻한 동전 낙하 음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일까.

 사실 이러한 풍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그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냉정한 생활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곳에 발자국의 흔적을 남겼던 사람들과 잠시라도 눈길을 줬던 그들의 마음이 편히 그곳을 지났는지, 아니면 불편한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도 한 여인으로서 치장은 못할지언정 철 지난 낡은 옷을 걸치고 등에 업힌 아기를 부양해야 하는 걸인 여자의 딱한 형편에 차라리 눈을 감으며 무심을 가장해 도망치듯 지나친 적이 어디 한두 날이었겠는가.

 그러면서도 왠지 동전 한 닢을 던져주지 못한 자신의 각박함에 스스로 놀라기도 하고 그 여인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길 때도 있었다. 영하 십여 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그 여인은 살아 있을까. 혹은 어찌 불행한 운명을 맞이했을까. 차라리 아기 우윳값이라도 보태 쓰라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 깡통 안에 넣어 줄 걸 하는 후회감이 앞설 때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을 다시 지나다가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벽면을 보고 돌아 앉아 아기에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을 볼 때, 그제야 여인이 살아 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좀 더 무거웠던 머리가 정리가 되고 진정으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주고서야 나의 야박했던 양심을 스스로 용서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자 집편에서 서무귀는 "천지자연이 만물을 보양하는 것은 똑같아서 귀천의 고하가 없습니다.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다고 많이 보양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 있다고 적게 보양하지도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현대가 아무리 복잡다단하고 생존 경쟁이 치열한 세계이긴 하지만 지하도나 환승역의 여인 또한 마땅히 천지자연의 보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것은 우리와 같이 평등하게 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환승역의 여인은 어쩔 수 없이 가냘픈 아기를 볼모로 자신과 아기를 보양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보양방법에 대해 누가 자신 있게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추운 겨울, 여자의 빈 깡통에 온기 가득한 마음을 넣어주며 추위를 나눠 갖는 것도 세상을 넉넉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인류애라 생각한다. 물론 장기불황과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우후죽순으로 설립된 모금 단체와 기부금 운영에 대한 불신 때문에 기부 문화가 크게 위축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기부는 어쩌면 여인의 깡통 속에서 낙하 음을 듣는 것이다. 갑자기 ‘겨울밤’이라는 동요 한 구절이 생각난다. 독일 민요이지만 너무도 귀에 익은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부엉 춥다고서 우는데/우리들은 할머니 곁에/모두 옹기종기 앉아서/옛날 이야기를 듣지요’

 희망이 가득한 2019년 새해가 막을 올렸다. 음력 섣달 추위는 나라님도 못 막는다는 강추위가 이제 계속될 것이다. 이 추운 계절 내 주위 어디엔가는 부엉이처럼 슬피 울며 구원 손길을 기다리는 불우한 이웃들이 많을 것이다. 서울역이나 수원역 혹은 지하도에서 오체투지로 엎드려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저들에게 천 원의 지폐 한 장 쥐어주는 것이야말로 희망의 불씨요, 행복한 기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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