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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올해는 1919년 ILO(국제노동기구)가 창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ILO는 노동 문제를 다루는 UN(국제연합)의 전문기구이다. 그런데 최근 EU(유럽연합)가 한-EU FTA(자유무역협정)에 명시된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나라를 상대로 분쟁 해결 절차에 돌입했다. 만일 우리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계속해서 불이행하면 EU와 체결한 FTA에 불리한 영향이 미칠 수 있고, 우리나라의 대외적 위상도 실추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1991년 12월 9일 ILO에 가입한 이후 수십 차례에 걸친 권고와 지적에도 불구하고 ILO 핵심협약(4개 분야 8개 협약)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결사의 자유’(제87호·제98호)와 ‘강제 노동 금지’(제29호·제105호)에 대한 협약의 비준을 지금껏 미뤄왔다. 특히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 제87호·제98호를 비준하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가 ‘노동 후진국’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주된 이유가 된다. 이 두 개의 협약은 대부분의 국가가 기본적으로 보장하는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노동3권은 곧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 조건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일컫는다.

 철학자 칸트는 "인간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고, 항상 목적으로서 존중돼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면에는 그의 존엄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는 오랫동안 인간을 도구·수단으로 삼는 노예제를 운영해 왔고,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이를 폐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모든 인간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할 권리’를 갖는데, 이는 곧 ‘타인의 결정에 의해 일방적으로 자신의 노동조건이 정해지는 것을 거부할 권리’이자 ‘노동자가 노동조건의 결정에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권리’를 의미한다. 인간은 짐승·기계처럼 맘대로 부릴 수 있는 객체가 아니라 ‘의사의 자유’를 지닌 존엄한 존재이기에 노동을 제공하는 조건을 정함에 있어서 ‘자기결정권’을 가진다. 그리고 이 자기결정권이 사용자와 대등한 관계에서 실효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동3권’이 보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3권은 노동자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핵심적 기본권으로서 헌법에 의해 보장된다(제33조 제1항).

 과거 독재정권의 위정자들은 우리나라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얘기하면 마치 공산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것처럼 치부하면서 이른바 ‘색깔론’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둘러 왔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는 ‘경제 성장’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미명하에 노동자의 권리를 희생시키고 뒷전으로 미뤄왔던 과거의 잘못된 인식과 행태를 떨쳐내야 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들의 생활규준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나가야 한다. 특히 인간의 생활은 ‘노동’을 떠나 이뤄질 수 없기에 ‘노동에 관한 규준’ 그 중에서도 ‘노동3권 보장’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시키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부에서는 IMF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나라와 경제에 큰 위난이 닥칠 것처럼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수용할 만큼 성숙했다. 노사관계의 평화·안정은 노동자의 권리를 탄압함으로써 얻어낼 수 없으며, 오히려 합당하게 보호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국민들이 IMF 핵심협약 비준에 대해 전향적·적극적인 태도를 지녀야 한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 공약인 IMF 핵심협약 비준을 과감하게 차질 없이 이행해야 한다. 물론 노사관계에 있어서 노동자의 권리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용자의 ‘경영권’도 존중돼야 하며, 노동권과 경영권이 합리적인 법의 틀 안에서 조화롭게 보호돼야 한다. 요컨대,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오랫동안 자의적·불법적으로 무시해왔던 암울한 노동탄압의 역사를 IMF 핵심협약 비준을 계기로 끊어내고 신(新)질서의 원년(元年)을 만들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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