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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수년 전에 한 국책연구기관에서 발간한 책자에 재미있는 설문조사 결과가 실려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가정의 경제적 수준과 무관하게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도 명문학교에 갈 수 있다’는 문항에 응답자의 68%가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특히 젊은 층의 부정적인 응답률이 83%로 가장 높았고, 40대도 71%, 50대는 58%, 60대는 64%였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도 경제적 수준과 무관하게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있다’라는 문항에서도 전체 응답자의 70%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한 입시전문 기관의 분석자료에 의하면 속칭 SKY대학의 합격생 중 고소득층 자녀의 합격률이 현저히 높다는 것이 증명되기도 했다.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는 경제적 수준이나 배경이 있어야 원하는 학교나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불공정하기 때문에 돈이나 배경이 없으면 뛰고 난다고 해도 어렵다’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고군분투(孤軍奮鬪)하며 살아온 50대, 60대 기성세대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20∼30대 젊은 층까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는 데는 정말 할 말을 잃는다.

 기자는 이 조사 결과를 들어 ‘이젠 개천에서는 더 이상 용이 나올 수 없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낸 결과라고 기사를 썼다.

 ‘개천에서 용 난다’란 말은 시원 찮은 가정환경의 변변찮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빼어난 인물이 되는 경우를 이르는 속담이다. 실제로 시원찮은 가정의 변변찮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음에도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소년등과(少年登科)해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들으며 이름을 떨친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옛날처럼 명문 대학에 들어가거나 고위 직책에 오른 사람, 재산을 많이 모은 사람을 소위 ‘출세’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 잘 만나서’ 라며 폄하(貶下)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을 결코 ‘출세했다’라거나‘용 됐다’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가 돼 소위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불법 행위로 이젠 영어(囹圄)의 몸이 된 사람들, 부부는 물론이고 세 자녀까지 탈세, 밀수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재벌가, 차마 말하기도 부끄러운 짓을 일삼고 재판을 받고 있는 성직자와 유명 인사들, 그들을 ‘용’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맑은 못을 흐리는 ‘미꾸라지’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학에 다니다가 그만 두고 자기가 좋아하는 ‘인터넷 글쓰기’로 성공한 젊은이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자신의 능력을 찾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십대 래퍼(rapper), 그리고 부모님이 운영해오던 어려운 식당을 이어 받아 값싸고 맛있는 김밥과 떡볶이를 개발해 소위 ‘대박’을 친 사람,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남 탓만 하고 불평만 일삼는 사람들 속에서도 빛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용’이 아닐까? 누구나 그러하듯 어릴 적부터 ‘어느 위치에 있던 그 곳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고 배웠기 때문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다.

 ‘이젠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은 나오지 않는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고 한 기자의 해석은 옳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도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원찮은 환경이나 변변찮은 부모, 다시 말하면 경제적 수준이나 배경이 좋지 않은 사람의 출신지를 ‘개천’이라고 보는 속담의 해석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경제적 수준이나 배경이 좋은 사람의 출신지가 용이 나올 수 있다는 바다나 큰 강, 혹은 깊은 호수가 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속담 속의 ‘개천’은 ‘경제적 수준이 낮고 사회적 배경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돈과 지위, 권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부모의 뜻대로 자녀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려는 비정상적인 가정’으로 재해석돼야 한다. 이런 가정에서는 절대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을 키워낼 수 없다. 그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수많은 사례들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용 될 고기는 모이 철부터 안다’ 라고 했고, ‘잘 자랄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고도 했다. 헛된 명성(名聲)보다는 널리 칭찬을 받으며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바로 ‘용’이고 ‘잘 자란 나무’이다. 그런 사람은 경제적 수준이나 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항상 자녀와 소통하면서 소질을 찾아 키워주고, 하고 싶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큰 강, 바다와도 같은 현명한 부모와 따뜻한 가정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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