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화두도 오사즉승리(惡寺則僧離)로 던져졌다. 절(寺)이 싫은 중(僧)은 떠나야 하는 가에 대한 물음이다.

 중이 절이 싫은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따지고 보면 절이 좋은 이유도 무량(無量)하다. 중과 절은 개인과 사회조직(가정·직장·국가)에 대한 비유다.

 지난해 3월 ‘중이 떠난 절은’ 제하의 오피니언에서 당시 절을 떠난 중은 ‘절 안에, 고리 안에, 삶 안에 있으라’라는 고언을 들었다. 중이 떠나도 절과 주지승의 일상은 하등 달라지지 않아서다. 오히려 남아 있는 행자와 동료 승, 주지승은 떠난 중을 욕보이며 절의 일상에 평온을 유지했다. 떠난 중이 제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조직)의 시비를 먼저 보고 아상(我相)에 휩싸여 있다고들 했다. 조직(의 평온)을 위해서는 절이 싫은 중이 떠나는 게 맞다는 이론이 현실로 입증된 것 같았다.

 절을 떠난 중은 새 절을 찾아 새로운 원(圓) 안에 들어갔지만 그 안의 예법과 의식, 규율 속에서 숱한 허물을 보고 이내 마음이 산란했다. 또 산사(山寺)의 일상사가 괜찮을 만하면 인간 관계가 꼬였고 인간 관계가 순통하면 참선과 정진이 불통이었다. 어지러운 마음속에는 어김없이 ‘오사즉승리’가 찾아 왔다.

 하지만 중은 이번에는 달랐다. 오사즉승리는 중을 버리고 절을 지키는 방편(方便)임을 알게 됐다. 절을 지키기 위한 편의적인 술수(術數)라는 말이다. 중은 절을 떠나지 않고 가장 큰 것부터 또는 가장 사소한 것들을 원 안에서 풀어가기로 했다.

 원 안에 있을 때가 삶의 실체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중은 원 안에서 원 밖의 것들을 연기처럼 끌어 들이되, 원 밖의 규격으로 원 안의 것들을 재단하지 않기로 했다.

 중은 또 억겁의 인연으로 맺어진, 동전의 양면 같은 속세의 업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괴로움을 덜 수 있는 출구를 원 안에 한두 개 만들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절을 떠날 수밖에 없는 중들은 일주문 밖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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