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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훈 경기본사 경제문화부장
난 곳은 이천(利川)이지만 자란 곳은 수원(水原)이다. 유치원부터 초·중·고를 모두 수원에서 나왔다.

 특히 유치원을 다니기 전부터 초등학교 5학년 초기까지는 경기도청이 자리한 인근 동네에 살았다. 도청 정문을 바라보고 왼쪽에 냇가가 있었고(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당시 아낙네들의 빨래터였다는 기억도 이 때문에 남아 있으리라.

 기억이 맞다면 고등동→세류동→교동의 순서로 이사를 다녔다. 대부분 세(貰)살이었지만 나름의 추억들이 있다.

 고등동에 살 적에는 앞마당이 있어 커다란 셰퍼드 한 마리가 뛰놀았고, 그 셰퍼드는 겨울에 눈만 내리면 왜 그리 날뛰는지 동네 아이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세류동에 살 적에는 목욕탕 앞 공사장에서 놀던 중 주인 아저씨의 호통에 놀라 도망치다 왼쪽 허벅지를 날카로운 무언가에 비어 난 상처가 아직도 있고, 교동에 살 적에는 인생 최초로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다.

 키우던 강아지가 병에 걸렸는데, 방과 후 귀가를 하니 강아지가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싶어 큰형에게 물어보니 그게 맞았다. 대문에 들어설 찰나 못 보던 박스 하나가 대문 옆에 있었는데, 임시로 그 박스 안에 생을 마감한 강아지를 놓아둔 것이었다. 차마 그 박스는 열지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다.

 이뿐 아니라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인근에 대한 추억은 이어진다.

 현재는 수원 내 상권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지만 2000년 전후만 하더라도 중심 상권은 ‘남문’ 일대였다. 사라진 중앙극장은 영국의 트라팔가 광장 못지 않은 만남의 장소였고,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는 일대 골목이 사람으로 꽉 차 한 발 나가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그러던 남문은 2000년 이후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고, 상권은 힘들어지며 슬럼화 현상까지 보였다.

 최근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조금씩 희망을 보이곤 있지만 아직 옛 명성을 찾을 만큼은 아니다. 앞서 말한 모든 지역은 팔달구(八達區)다.그런데 이 팔달구가 최근 정부의 부동산 규제 중 하나인 ‘조정대상지역’으로 지정됐다. 한마디로 ‘묶인’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수원역 일대의 교통 인프라와 재개발 등으로 인한 집값 상승이지만 수원에 거주하는 이상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물론 팔달구 내 일부 몇몇 지역은 투기 조짐이 있긴 하지만 팔달구 전체를 묶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대놓고 말하지만 수원역 옆 LH가 시행하는 ‘고등지구’나 잡음이 있긴 하지만 진행되고 있는 ‘세류동 재개발 지역’을 제외하면 팔달구는 아직도 원도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과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팔달구 내 신도심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2009년 재건축으로 준공된 A아파트의 경우 2010년 1월 84.99㎡의 가격은 4억5천500만 원이었다(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사이트 기준). 같은 단지라도 동과 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2019년 1월, 같은 면적의 거래가를 알아봤더니 4억5천850만 원이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 또한 팔달구 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정대상으로 묶였다. 정부의 세심한 정책이 아쉬운 부분이다.

 세심함을 탓하지 않더라도 형평성에 어긋난다. 서울은 특별시이고, 인천이나 부산과 같은 곳은 광역시이다. 지방선거 때마다 투표를 통해 구(區) 별로 청장을 뽑는다. 그러나 수원을 비롯해 수많은 다른 시(市)는 어떠한가. 같은 ‘구’자를 쓰더라도 행정적 혹은 정치적 관점이 전혀 다른 곳이다. 그런데 이런 규제에는 동일한 ‘구’로 묶는다는 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투기 세력을 잡는다거나 집값 안정을 위한 정책에 항변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건 박수를 치고 싶다. 적어도 현 정부라면 과거와 같은 나태함을 따라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적어도 동(洞)별이거나 아파트라면 단지별로 구분하는 게 맞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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