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행정학박사.jpg
▲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또는 이 사람 저 사람 때문에 속상한 일이 참 많습니다. 마음은 즐겁게 살고 싶은데 삶은 마음대로 그렇게 되질 않곤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어느 책에서 읽은 사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부인이 유명한 화가가 직접 그린 비싼 그림을 샀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그 그림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의심이 가서 감정사에게 물었습니다. 감정사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자신의 친구이고 그가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말했지만, 부인의 의심은 가실 줄 몰랐습니다. 할 수 없이 감정사와 함께 부인은 화가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화가가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이 그림은 진품이 아닙니다."

 당황한 감정사가 "무슨 소리야? 자네가 이 그림을 그릴 때 내가 자네 옆에서 분명히 봤는데"라며 소리쳤습니다. 화가가 비로소 진품이 아닌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래, 맞아. 이 그림은 내가 직접 그렸네. 그러나 누가 그렸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설사 내가 그렸다고 해도 내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그리지 않았다면 진품이라고 할 수 없네. 이건 모조품일세."

 자신이 직접 그렸지만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이라는 화가의 말에서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진품이란 누가 그렸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겠지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라는 가르침이 화가의 대답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요.

 삶도 그렇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느냐는 겁니다. 누구나 남들에게 자신의 좋은 면만을 보이려고 하겠지요. 좋은 면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왜 그런 면을 보였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좋은 행동이라면 그런 행동은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때로는 모조품을 진품이라고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을 마음이 ‘장난을 친다’고 말합니다.

 어느 스님의 책에 소개된 우화가 마음이 어떻게 장난을 치는지를 아주 쉽게 이해하게 해줬습니다.

 다리가 백 개나 달린 지네가 자연스럽게 걷고 있는데 여우가 나타나 물었습니다.

 "지네야, 나는 다리가 넷밖에 없는데도 가끔은 어느 발을 먼저 내밀어야 할지 헷갈릴 때가 있어. 그런데 너는 그렇게 많은 다리 중에서 어느 발을 먼저 내디뎌야 하는지, 어떻게 아니?"

 그러자 지네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합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바보야, 네 다리인데 네가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생각해? 한번 생각해봐!"

 여우가 떠나고 지네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발 다음에 어느 발을 내디뎌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때부터 지네의 걸음걸이는 무척이나 불편해졌습니다. 여우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리가 있는지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걸었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장난을 친 겁니다. 마음의 장난에 휘둘리게 되면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상대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사실’이라고 믿어버린 탓입니다. ‘사실’은 객관적이지만 ‘판단’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진품은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모조품은 너에 대한 나의 왜곡된 판단을 사실이라고 믿는 ‘나’입니다. 내가 진품으로 살아가면 너와 나는 행복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모조품으로 살아가면 불행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