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음악이 가게 안의 적막을 깼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가봉한 코트를 입어 보러 온 손님이다. 남자 손님과 양복점 주인은 한참을 서서 어깨, 깃, 품, 기장, 소매, 주머니를 꼼꼼하게 살펴봤다. 남자 손님은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그때마다 양복점 주인의 손은 바빠졌다. 옆에서 여자 손님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여자 손님은 1년 전쯤 아들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이 가게를 알게 됐다고 했다. 60대 어머니는 "그때부터 이곳에서 옷을 맞추고 있는데, 아들의 요구를 사장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말을 건넸다. "아들이 좋다고 하니 나도 좋다"고 했다. 20대 아들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옷감 샘플을 들고 나란히 가게를 나섰다. "조만간 여름 정장을 맞추러 다시 들르겠다"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1월 셋째 주 화요일, 대기를 가득 메운 미세먼지를 몰아내려 찬바람이 싸늘하게 불던 오전 중구 용동 도성양복점 안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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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성 도성양복점 대표가 지난 15일 인천시 중구 용동에 자리한 양복점에서 자신이 만든 양복을 들어보이고 있다.
# 실향민에서 양복 장인으로

 도성양복점은 김진성(83)대표가 1969년 창업한 맞춤 양복점이다.

 황해도 옹진 출신의 김 대표가 한국전쟁 때 홀로 월남한 뒤 인천에 정착해 양복 일을 배우면서 이 가게는 시작된다.

 "중학교 2학년 때 6·25가 터졌고, 이듬해 1·4후퇴 때 섬으로 피난을 갔어. 그곳에서 학도유격대에 자원 입대했지. 그때는 몇 개월이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휴전을 불과 몇 개월 앞둔 겨울, 그는 군부대 철수로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혈혈단신 전라도 나주까지 내려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남의 집 과수원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힘겨울 때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아버지가 24살에 돌아가셨어. 그때 내가 4살이었고, 여동생이 2살이었지. 어머니가 홀로 얼마나 힘들게 사셨겠어. 그래서 다짐했지. ‘언젠가 어머니를 다시 만날 텐데 열심히 살아야겠다. 반드시 성공해야겠다’고 말이야. 일하면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학업을 놓지 않았어.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그러던 중 피난 나온 고향 사람들이 인천에 많이 산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는 망설임 없이 나주를 떠나 인천으로 올라왔다.

 상경하자마자 고향 사람이 운영하는 중앙시장 유창양복점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일하면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양복점에서는 용돈 정도의 돈을 받았지만, 나주 과수원에서 일하며 벌어놓은 돈으로 고등학교 입학금을 낼 수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자정이 지나 불이 꺼지면 촛불을 켜놓고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상한다.

 "신흥동 해광사 근처 항도고 야간부에 들어갔는데, 아침밥 조금 먹고 양복점 가서 일하다가 저녁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했지. 그 생활을 1년 정도 하니까 도저히 배가 고파서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지경까지 간 거야. 돈을 더 벌어야 했어. 다행히 가장 큰 양복점인 희망양복점에 스카웃돼 다시 공부할 수 있게 됐지."

 김 대표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졸업을 했고, 서울 종로3가에 자리한 건국대 전신 정치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해 1962년 졸업했다.

 졸업 전에 취직도 했다. 국영기업체인 한국기계에 들어갔다. 당시 공무원 초봉이 1만5천 원 정도였는데, 그는 3만 원을 받았다고 했다. 결혼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려 갔다.

 하지만 양복을 만들었던 일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양복을 만드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결국 1961년부터 시작한 회사생활을 1968년에 접었다. 마련한 집을 팔고 퇴직금에 빚까지 얻어 중구 용동 동인천 길병원 자리에 ‘도성라사’를 열었다.

천의 옛 도성라사 개업 당시 사진.
 # 도성양복점 전성기

 호기롭게 양복점을 열었지만 곧 후회했다. 초기에 친구들이 찾아와 양복을 몇 벌 맞춰 주기는 했으나 돈이 벌리는 대신 외상값만 쌓여 갔다. 손님도 거의 없었다.

 "회사에 다녔으면 밥은 먹고 살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갈수록 고민이 커졌지만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그러다 1972년 전국신사복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양복점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주문이 정신없이 밀려 들어왔다. 한 달에 보통 100벌을 만들었다. 많을 때는 200벌도 만들었다. 가게를 연 지 3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 확장 개업도 했다. 1층에는 양복점, 2층에는 공장을 차렸다. 직원이 20명까지 늘었다. 1985년에는 현 도성양복점 건물을 인수했다. 양복점을 낸 지 16년 만이었다.

▲ 지난 50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한 도성양복점 작업실 낡은 재봉틀.
 김 대표는 양복점이 번성하게 된 이유로 ‘고객관리’와 ‘직원관리’를 든다. "양복기술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사업에는 자신이 없어 공부를 했어. 그때 가톨릭회관에서 고객관리에 관한 강의를 들었지. 가격 물어보는 손님한테 바로 가격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앉으라고 하고 차를 내준 뒤 대화를 이어가는 거라든지, 처음에 손님과 테이블에 앉을 때는 마주 앉는 것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앉는다든지 이런 것들을 배웠어. 직원관리도 철저히 했어. 나이가 어린 직원한테도 꼭 ‘선생’을 붙여서 불렀지. 내가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대접을 해 줘야 하니까. 또 고객과의 약속, 기술 개발, 태도 등으로 인사고과를 매기고 매달 결과를 공개적으로 발표했어. 규칙을 3번 어기면 해고도 했고."

# 사라져 가는 양복점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진 전성기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꺾이기 시작했다. 인천의 ‘명동’이라 불렸던 도성양복점 일대도 쇠퇴했다. 여기에 대기업이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면서 사람들은 저렴한 기성복을 사서 입었다. 그 많던 단골손님들이 떨어져 나갔다.

 김 대표는 경기가 점점 나빠지자 2003년 건물을 처분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양복점을 바로 접을 수는 없어 몇 년만 운영할 생각에 건물 3층으로 올라왔다. 다른 데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둘 양복점 문을 닫고 떠났다.

 "이제는 10명 정도 단골손님만 남았어. 처음에는 고객과 업주로 만났지만 함께 보낸 세월이 수십 년이니 서로에게 친척 같은 존재가 됐지. 양복점을 거쳐간 손재주 좋은 제자들도 많았어. 전국대회에서 금·은·동메달을 딴 제자도 4명이나 됐는데, 지금은 단 한 명만 양복을 만들고 있지. 많이들 그만뒀어."

▲ 김진성 도성양복점 대표가 인천시 중구 용동에 자리한 양복점 작업실에서 고객의 양복을 다듬기 위해 사이즈를 재고 있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게 문을 연다. 엘리베이터 없는 3층 건물 계단을 매일 오른다. 요즘 같은 겨울이면 손님이 추울까 서둘러 손님용 테이블 옆 전기난로부터 켜놓는다. 그렇게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한다. 직원만으로도 북적였던 가게는 어느덧 줄고 줄어 김 대표만 남았다. 청소도, 손님맞이도, 재단도, 가봉도 이제 다 그의 몫이다.

 "가게를 정리하려고 건물 3층으로 올라왔는데 고객들이 계속 찾아주는 거야. 고객도 있고 건강하고 일할 수 있으니 행복하지." 따뜻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한 가득 퍼졌다.

 조현경 기자 cho@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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