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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선 전후 모습.
이제나저제나 손꼽아 기다렸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송월동이 그렇구나! 마을 사람들은 가슴이 부풀었다. 남루하고 초라한 삶에 어깨 펼 날 없었던 송월동 사람들에게 곧 있을 거라는 개발 소식은 희망의 빛줄기였다. 이제 허리 좀 펴겠거니 했던 순간, ‘와르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름져 번들거렸던 개발계획은 송월동 사람들을 일순간 배반했다. 인천역 주변 44만㎡ 규모의 재정비촉진지구가 지정 1년 6개월 만인 2010년 1월 해제됐다. 가뜩이나 없는 자들의 묵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송월동은 나락으로 빨려 들었다.

 젊은 사람들은 송월동을 버리고 떠났다. 남은 것은 쭉정이 같은 헌 집과 삶의 무게에 짓눌린 늙음뿐이었다. 주민이 스스로 나서는 자발적인 환경개선사업을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집 앞에 쓰러기 더미가 수북이 쌓여도 누구 하나 신경 쓰고 치우는 이가 없었다. 우중충한 집들로 채워진 골목은 늙은 마을 사람들의 해바라기 장소일 뿐이었다.

▲ 개선 전후 모습.
 인천시 중구는 2012년 ‘그림마을’ 경남 통영시 동피랑과 부산시 감천, 수원시 행궁터 등지 문화마을을 찾아 송월동 살리기를 고민했다. 다행히 송월동에는 관광 소재 거리가 될 만한 일본식 주택이 더러 남아 있다. 송월교회 밑으로 동일방직과 인천전기 사택으로 쓰였던 모양 비슷한 일본풍 단독주택이 몰려 있다. 응봉산 가풀막에 집을 짓고 계단으로 이은 터라 골목은 푸근하고 아기자기했다. 알록달록 색깔을 입혀 이국풍으로 분위기만 잘 잡는다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질 법도 했다.

 송월동이 어떤 곳인가? 오래전에 독일인과 영국인 등 외국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던가. 게다가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조금은 낯선 일본식 가옥과 오래된 한옥 살림집도 어울려 있지 않는가. 만들자고 들자면 얘깃거리는 차고도 넘쳤다. 송월교회 내리막길 옆에는 우물과 송월국민학교 자리였던 인천기상대 입구의 자유유치원, 그리고 인향야간중고등학교까지 얘기는 수두룩하다.

 지금은 폐쇄돼 포토존으로 쓰이고 있는 이곳 우물은 송월동 어부들이 갓 잡은 생선을 씻는 곳이었다. 어시장이 연안부두 쪽으로 이사 가기 전 인천역 인근 만석우회고가 밑은 1970년대 초반까지 객선부두이자 어시장이었다. ‘뱀골’, ‘새우젓골’ 등으로 불리는 북성동 쪽방촌도 어시장이 있을 당시 생긴 이름이다.

▲ 개선 전후 모습.
 기상대 정문 앞에서 내려가면 자유유치원과 마주한다. 이 자리는 원래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이 있었다. 우아한 서양식 2층 석조 건축물로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께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강화도와 영종도, 자월도까지 풍광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이 자리에 총독도 눈독을 들일 만했으리라.

 자유유치원 아랫길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전봇대 표지판을 따라 골목길로 접어들면 허름한 이층집과 만난다. 인향야학이다. 1970∼80년대에나 봄직한 야학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인향야학이 문을 연 지는 60년 가까이 된다. 인천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야학이다. 인향야학은 1962년 도원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변변한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하는 방랑자 신세였다. 이후 몇 번의 짐을 싼 끝에 이곳 옛 송월동에 둥지를 틀었다.

 중구는 2013년 원도심활성화 종합계획을 세우고 그해 10월 동화마을 휴게쉼터 조성사업계획을 수립했다. 공사를 본격화하기 전 송월동 2가를 중심으로 주민대표를 3명을 뽑았다. 인하대 도시재생대학원에서 3개월 코스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해 12월 송월동 동화마을 1단계 사업을 마쳤다. 40여 가구의 벽에 동화에 나오는 캐릭터를 그리는 작업이었다.

 처음은 쉽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주민들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손사래 쳤다. "담벼락 칠하면 쌀이 나오고 밥이 나오냐"며 타박하기 일쑤였다. "정 할 테면 집수리부터 해 달라"고 지청구를 해댔다. 주민대표 등으로 구성된 협의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반대 노인들을 설득했다. 말로는 먹혀들지 않았다. 주민대표들이 직접 나섰다. 고장 난 수도꼭지를 고쳐 주기도 하고, 다 떨어진 벽지를 걷어내고 새로 도배를 하며 토라진 주민들의 마음을 샀다.

▲ 개선 전후 모습.
 막상 볼품없던 벽이 동화 속 주인공 등장으로 화사하게 변신하자 주민들은 마음을 돌렸다. 가스 밸브함은 ‘오즈의 마법사’의 양철 나무꾼이 새겨졌다.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등 동화 속 장면들이 벽을 수놓았다. 아기 사슴의 조형물, 초가지붕과 미닫이 문짝, 장독대와 농기계 소품들로 골목길 한쪽을 채웠다. 과거 우물 터를 새롭게 단장하고 쉼터로 제공했다. 쓸쓸하고 적막했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고 생기가 돌자 반대 주민들 사이에서 야단났다. "내 집 벽에는 왜 그림을 안 그려 주느냐"며 되레 핀잔했다.

 중구는 2015년 7월까지 동화마을 2단계 사업을 벌여 150가구의 벽에 동화를 그리고 조형물로 단장했다. 면적으로 치면 전체 6만7천㎡ 중 30%가량인 2만2천㎡였다. 사업비는 전체 70억4천600만 원(시비 28억7천100만 원)이 들었다.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업 초기 연간 100만 명이 송월동 동화마을을 찾았다. 관광객을 겨냥한 상점과 체험시설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옆 동네 차이나타운도 덩달아 신이 났다. 주말이면 물 밀듯 밀려온 관광객들로 중국 식당 문 앞은 사람의 물비늘이었다. 중국 음식점 일부는 동화마을로 영업점을 옮기기도 했다.

 카페와 퓨전요리점 등 상점이 늘어나면서 땅값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동화마을을 조성하기 전 웬만한 가게의 매매가는 3.3㎡당 300만∼400만 원이면 족했다. 1단계 조성공사가 끝나자 땅값은 700만∼800만 원으로 두 배 이상 뛰었다. 2단계 공사가 마무리되자 목 좋은 상점 자리는 3.3㎡당 1천만 원 갖고는 흥정조차 못 할 정도다.

 간간이 노인들만 보였던 좁은 골목길에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송월동에 상점을 얻고 집을 마련한 젊은 외지인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 그만큼 송월동 사람들은 바뀌었다. 원주민들이 떠난 자리를 외부인들이 채웠다. 송월동 동화마을의 원주민들은 이제 10%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 90%는 돈벌이를 위해 찾아든 바깥 사람들이다.

 동화마을의 인기도 서서히 식어 가고 있다. 2015년 7월 문을 연 유료 관람시설인 트릭아트스토리의 관람객과 입장료 수입이 시간이 흐를수록 시들해지고 있다. 한 번 왔다 간 관광객들이 더는 찾지 않는다는 얘기다. 송월동 동화마을의 대수선이 필요하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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