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한 어촌은 각국의 기선(汽船)이 들끓었다. 세계로 향해 열린 바다의 길목이었다. 동네 가팔막 모퉁이에는 우리나라 길의 새 역사를 쓴 ‘철도(鐵道)’가 놓였다. 그 철길은 왕조의 심장부 서울에 닿았다. 먼 생애들은 이 길들을 따라 들고나면서 그곳에 새것들을 풀었다.
높이 69m의 응봉산 비탈에 웅크리고 있는 송월동 자드락길을 기웃거리면 가난했던 그 시절의 서러움이 읽힌다. 멀지 않은 만석우회고가 너머로 대한제분 건물이 한눈에도 우뚝하다. 하얀 벽체에 적힌 큼지막한 ‘곰표 밀가루’ 상표가 구슬픔으로 다가온다.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 했던 1952년 북성동(北星洞) 매립지에 대한제분이 세워졌다. 제 힘으로 삼시 세끼를 책임질 수 없었던 배곯던 시절에 국내 최대의 제분시설이 생긴 것이다. 그 공장이 걸러내고 빻았던 밀가루는 해외 민간구호단체의 원조로 국내에 들여온 구호양곡이었다.
인천전기는 개업 한 달 만에 1천여 개, 2개월 뒤에는 1천800여 개의 등을 달아 인천의 밤하늘을 밝혔다. 한동안 호황을 누렸던 인천전기는 1910년 말 690가구에 등 3천860개를 공급했다. 이후 치솟는 수요를 감당할 수도, 새 설비를 늘릴 능력도 없었다. 툭하면 전기가 끊겼다. 결국 인천발전소는 1922년 7월 문을 닫았다.
신문물 중 인기를 끈 것은 비누였다. 인천서 비누를 처음 만든 것은 1895년께지만 본격적인 비누 생산은 1912년부터였다. 1912년 일본인 ‘오다’가 송월동에 ‘애경사(愛敬社)’를 세웠다. 1954년 제주도 출신 채몽인 씨가 이 공장을 인수해 ‘애경유지공업㈜’을 창립해 종업원 50명을 두고 비누 사업에 나섰다. 오늘날 애경그룹의 모태다. 당시 ‘애경’은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미향’이란 브랜드의 비누만 한 달에 100만 개를 팔았다. 경인국도를 달리는 차량 대부분이 애경유지 트럭이었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였다. 애경은 1962년 본사를 영등포로 이전했다.
송월동은 한국 최초의 기계식 소주 생산 공장인 조일양조도 잉태했다. 조일양조는 1906년 송월동에서 ‘요시가네’ 양조장으로 시작했다. 1919년 도원동 ‘다꾸고메이’ 인천양조장을 인수하고 소주를 생산했다. 남한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소주 공장이었다. 조일양조의 ‘금강표’ 소주는 양조계의 선두 주자였다. 1939년 이후에는 만주지역 시장에도 진출했다.
참외전길을 건너 송월1가는 한국인이 살았다. 그곳에는 지금 재난위험시설 E등급 판정을 받은 송월시장의 잔해들이 스산하다. 1937년 2월 설립된 송월시장은 원래 가축시장이었다. 말을 키우던 곳이라 해서 ‘말깐(말간)’ 또는 ‘돼지장터’라고도 불렀다. 광복 후 만석동 동일방직과 인천전기 등 만석동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로 한때는 꽤 번성했던 시장이었다. 하지만 철도 길 담으로 만석동과 막히면서 상권이 빠르게 시들었다.
1904년 우리나라 최초로 일기예보를 알리는 ‘인천기상관측소’가 응봉산 밑 자락에 마련됐다. 중구청 뒷길에 있던 스이쯔 여관에서 차린 임시 기상사무실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됐다. 1905년 1월 1일 대한제국 황실 재산이던 응봉산 마루 지금의 자리에 인천관측소를 신축했다. 목조 2층에 210㎡ 규모였다. 풍력계·지동계·일조계·자동강우계·백엽상·증발계 등 당시로서는 첨단 장비를 갖췄다. 처음 일기예보는 낮에는 깃발, 밤에는 전등이 쓰였다. 큰 삼각형 녹색 깃발은 동풍을, 청색 깃발은 서풍을 알렸다. 사각형 깃발로 맑음은 흰색, 비는 청색 등으로 예보했다. 밤에는 깃발 대신 여러 색깔의 전등을 내걸어 날씨를 전했다.
송월동에 신문물이 밀려들면서 우리의 것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인천기상대와 제물포고등학교를 껴안은 ‘응봉산’의 근본 없는 이름이 그래서 애처롭다. 나라를 잃고 우리말조차 빼앗긴 암흑의 한(恨)이 이 산에 배어 있다.
이 산의 우리말 이름은 ‘매부리산’이다. 한자 이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산을 뜻하는 우리말 ‘매(뫼)’를 새 ‘매’로 잘못 알아 ‘응(鷹)’으로 옮겼고, 봉우리를 뜻하는 우리 말 ‘봉’ 대신 한자 ‘봉(峯)’을 썼다. 응봉산은 한때 ‘오포산(午砲山)’이라고도 불렸다. 1906년 2월부터 낮 12시면 응봉산 마루 인천기상대 마당에서 대포의 굉음이 울렸다. 시계가 귀했던 시절, 러일전쟁(1904∼1905년) 이후 쓸모없는 대포로 시각을 알리는 소리를 냈다. 정오(正午)의 공포(空砲)는 1925년까지 계속됐다. ‘꽈∼앙’ 지축을 흔드는 대포 소리는 식민지 민초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공포(恐怖) 그 자체였다. 송월마을과 그 주변에는 개항 이후 한국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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