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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국제펜클럽인천지부 부회장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은 어떻게 이동할까? 유치원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의인화한 씨앗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씨앗의 여행은 재미있는 동화가 되어 인기가 있었고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씨앗의 여정에 몰입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토양은 종자은행’이란 글을 우연히 보게 됐다. 이야기 속의 상상이 국립생태원 이효혜미 선임연구원의 글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있었다. 아이에게 들려줬던 씨앗의 여행은 여러 버전으로 시리즈를 만들 만큼 인기가 좋았는데 선임연구원의 글을 읽으니 자연의 생명 여정이 경이로워 생명 있는 유체가 위대해 보였다. 습지 물 고인 곳의 흙 조금을 떠와 배양했더니 무려 537개의 식물 싹이 틔워져 나왔다고 한다.

 이 실험은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물새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종자를 운송한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한 것이다. 세 숟가락 분량의 흙에서 발아한 식물은 종류도 다양했지만 먼 곳에 있는 섬에서만 자라는 식물도 있었다. 물새가 습지를 돌아다니며 먹이 활동을 할 때 발가락에 묻은 진흙에 종자가 붙어 이동을 한 것이다. 철새의 발톱 틈새에 진흙과 같이 끼어서 여행한 동화 속 씨앗 이야기와 흡사해 엄마는 생태학자이기도 했네, 혼자 흐뭇했다.

 흙 속에 묻혀서 싹을 틔울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휴면 기간 동안 씨앗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성인이 된 아이가 엄마의 동화에 흥미를 가질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씨앗이 싹을 틔울 꿈을 꾸며 생장활동을 정지하고 때를 기다리는 휴면기 이야기도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다. 씨앗은 가뭄에도 추위에도 심지어 산불에도 살아남는다 한다. 사막이나 극지방뿐만 아니라 혹독한 환경에서도 씨앗의 생명을 보전하게 해 주는 일종의 종자은행이라 할 토양은 자연유지장치 기능을 수행해주어 생물다양성 보존 일등 공신이라는 선임연구원의 글에 공감이 됐다. 연구 발표를 보면 한강 유역의 물가 토양 속에도 1㎡당 12만5천 개가 넘는 종자가 들어 있다고 한다. 개중에는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드는 운 좋은 경우도 있을 테고, 새나 곤충 토양 미생물의 먹이로, 혹은 생을 다해 흙 속의 영양분으로 분해돼 자연생태계 보전에 일조한 씨앗도 있을 터라 씨앗의 생이 가뭇없이 위대해 보인다.

 씨앗 이야기가 길어졌다. 근래에 만난 한 아이가 생각나서다. 단비는 스물일곱 어여쁜 나이로 피어나 있었다. 한때 주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단비네는 격정적인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몰락해 갔다. 아버지의 과한 욕심이 부른 투자는 불법을 불러와 파산하게 되고 도망자의 몸이 돼 가정을 팽개쳤고 엄마의 섬섬옥수는 농산물 가게의 판매원으로 거칠어져 엄마의 여린 가슴에 생채기를 만들었고 오빠는 학교 일진 문제아로 자퇴를 했다. 단비도 학교생활에 부적응이라 대안학교를 전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마주한 단비는 걱정과 염려를 던져버려도 될 밝은 얼굴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못 본 지 오래됐고 간간이 가슴 아픈 소식만 전해 들었는데 그마저도 근래 몇 년은 소식 두절이었다.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했다. 단비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급속한 몰락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세파에 휘둘릴 때 빌려간 돈이 있는데 갚지 못해 늘 마음의 짐이 됐다며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다고 울먹였다. 여윳돈이 아니라 내 보험을 담보로 대출해 빌려준 돈이라 세월이 지나면서 오지랖이라고 자책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온 지 두 해가 지났다며 가족 넷이 다 일을 하면서 재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반가웠다. 그 중에서도 단비가 마음잡고 직장에 성실히 다닌다는 말이 제일 반가웠다. 단비와 단비 엄마와 식사 약속을 했다. 종알종알 명랑했던 단비는 성숙해져 모란꽃처럼 환한 아가씨가 돼 있었다. 극한의 시간을 견디고 발아한 단비의 휴면타파가 장해서 단비를 격려해 줬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 단비가 단단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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