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이어서 치과를 해서 그런지 믿음이 가. 다른 치과를 다녔지만 여기만큼 잘 보는 치과는 없어. 원장도 간호사도 모두 친절해. 이빨을 빼는데도 하나도 안 아파."

 인천시 동구 송림오거리 한 켠에 자리한 ‘중앙치과의원’. 이곳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이 건넨 칭찬이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2시. 병원은 환자를 보느라 분주하다.

▲ 동구 중앙치과의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창수 원장.
 "할아버지 조금 따끔해요"라는 원장의 목소리. 연이어 들리는 치과 치료기기의 요란한 울림. 그리고는 입 안에 솜을 물고 나오는 환자. 3대째 가업을 이어오며 오롯이 환자만을 위한 치과병원으로 소문난 중앙치과의원의 모습이다. 이곳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노포(老鋪·오래된 가게)로,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1934년 설립된 중앙치과의원의 초대 원장은 고(故) 이시찬 원장이다. 2대는 고(故) 이익원 원장, 현재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3대 이창수 원장은 모두 가족이다.

 이를 보여 주듯 병원 한쪽 벽에 판넬로 제작된 빛바랜 흑백사진의 역대 원장을 소개하는 액자가 걸려 있다.

 중앙치과의원은 초대 이시찬 원장이 1934년 경성제국대학 치전원을 졸업한 후 서울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동구 송림4동 삼거리 인근에 ‘중앙의원’이라는 간판으로 병원을 세우면서 시작된다. 당시 이시찬 원장은 내과의사 자격도 가지고 있어 치과와 내과를 같이 진료할 수 있는 의원으로 출발했다.


 1968년 이시찬 원장이 작고한 이후 아들 이익원 원장이 곧바로 병원을 운영에 참여한다. 이익원 원장은 병원 터를 지금의 송림5거리 인근으로 옮겨 치과를 전문으로 하는 중앙치과의원으로 개원한다. 그때가 1972년이다.

 그런 후 아버지가 환자를 보는 모습만 바라보면서 자란 이창수 3대 원장 역시 1982년 치과대학에 합격한 후 중앙치과의원 가업을 이어갈 준비를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아버지와 함께 환자를 보기 시작한 이창수 원장은 2000년 아버지가 타계한 후 3대 원장으로 부임해 현재까지 85년간 중앙치과의원을 지키며 이곳을 찾는 환자를 돌보고 있다.

 요즘 중앙치과의원에는 이창수 원장과 3명의 간호사가 환자들을 맞는다. 진료시간은 월·목요일 오전 10시~오후 8시30분, 화·수·금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늘 웃는 얼굴로 환자를 보고 있다. 토·일요일은 다음 날 즐거운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기 위해 병원도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 ‘가장 의사다운 의사’ 이시찬 초대 원장

▲ 인천시 동구 중앙치과의원을 이끌어 온 역대 원장들.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이시찬 원장은 남들보다 먼저 서양 문물에 눈을 떴다. 나름 가정형편이 좋았던 탓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여기서 내과와 치과를 공부했다. 1934년 대학 졸업과 함께 인천에 터를 잡고 중앙의원을 설립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음에도 ‘병원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일본인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차별을 덜 받았다. 그런 탓에 조선총독부 총독과도 친분이 있었다. 누가 보면 매국이나 친일파로 오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초대 원장은 오히려 의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동포들을 도왔다.

 그가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나라 잃은 슬픔에 빠진 동포들의 생명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나라를 잃은 것도 서러운데, 병까지 앓는다면 그 비참함은 뼈를 깎는 아픔인 것을 알았다. 일본인들 역시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림인지라 의사라는 직분을 등한시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 일본인들과 동포의 피를 빨아 잘 사는 친일파들이 병원을 찾으면 병원비를 더 받거나 정확하게 받았다. 그리고는 그 돈을 아껴 조선인들이 병원을 찾으면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진료를 해줬다. 그러다 보니, 치료를 받은 조선인들은 달걀 한 줄, 고구마나 감자 한 바구니 등을 건네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 초대 원장 역시 당시 조국을 빼앗긴 아픔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표출하는 것이 우리 동포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 오로지 의사로서의 길만 걸었다. 일본인이나 조선인으로 나누지 않고 병원을 찾는 사람은 그냥 환자로만 바라보고 치료에 전념했다.

 그렇게 뼛속까지 의사였던 이 초대 원장은 해방 이후에도 동구지역에서 인술을 펼치다 1968년 별세했다. 그 뒤를 이어 아들인 이익원 2대 원장이 대를 이었다.

# ‘봉사하는 의사’ 이익원 2대 원장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사의 길로 들어선 이익원 원장은 의술을 펼치는 봉사자의 길을 택했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나온 그는 병원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보건소장으로도 근무했다. 특히 1968년 중앙치과 원장으로 부임한 그는 병원 경영보다 봉사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이창수 중앙치과의원 원장.
 의사는 생명을 살리고 병을 치유하는 ‘신의 부름을 받은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1년 중 반 이상을 환자들을 찾아 다니는 데 매진했다. 쾌적한 병원에 앉아서 환자를 봐도 충분한 것을 굳이 한 번 나가면 보름도 좋고, 한 달도 좋은 병원선을 타기 일쑤였다. 적십자병원선을 주로 탔던 그는 의료시설이 없는, 심지어 보건소도 하나 없는 서해와 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찾아 다녔다.

 병원선은 타는 것만으로도 중노동인데도 그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로지 섬 주민들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자신의 소명인냥 가족보다 오히려 섬 주민들을 더 챙겼다. 이런 그의 모습에 가족들은 못마땅해 할 때가 많았다.

 그는 그냥 섬 주민들이 "고마워요.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밥도 잘 먹고, 여러 음식을 편안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피곤이 풀렸다.

 이렇다 보니 그가 병원선을 타지 않는 날인데도 오히려 섬 주민들이 뭍으로 나와 병원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 환자들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다시는 아프지 말라"고 말을 건네며 의사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봉사하는 의사’로 불리던 이익원 원장의 꿈은 당초 의사가 아닌 ‘성악가’라는 얘기를 뒤늦게 듣고, 과연 어떤 목소리의 소유자이기에 성악을 꿈꿨고, 환자들을 편안하게 만들었는지 그의 목소리가 아주 궁금했다.

# ‘의사가 천직’ 이창수 3대 원장

 "할아버지와 아버지만큼 훌륭한 의사는 아니지만, 저 역시 그분들의 뜻을 받들어 의사가 됐고, 환자를 보는 것 하나만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조부와 선친의 가업을 잇기 위해 치과대학에 입학한 이창수 3대 원장. 그는 밀레니엄 시대에 의사를 하고 있는 만큼 또 다른 삶을 꿈꿔 볼만도 한데, 오롯이 의사 외길을 걷고 있다.

 "나도 당연히 치과의사가 돼야 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껏 환자만 보고 살았던 것 같아요."

 1994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서 환자를 본 그는 선친인 이익원 2대 원장이 2000년 작고한 후 원장에 올라 85년째 가업을 잇고 있는 주인공이다. 주변에 병원도 많이 늘어난 터라 경쟁에서 밀릴 걱정을 해야 함에도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본업에 충실하며 의사의 길을 가고 있다.

▲ 이창수 원장이 환자의 치아를 살펴보며 치료를 하고 있다.
 사실 그는 고교시절 대학 진학을 앞두고 치과보다 문과로 진로를 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업을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자신의 진로보다 앞섰던 것 같다.

 "아무래도 예전에 가졌던 꿈이 지금 되살아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시인, 소설가 등까지는 한참 멀었지만, 내가 하고 싶어했던 또 다른 삶에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아직 미천합니다."

 그리고 그는 낚시광으로도 소문이 나 있다. 주말이면 낚시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전국 낚시터를 돌아다니고 있다. 현재 루어낚시 동호회인 ‘가람과 벗’의 화장이기도 하다.

 이런 자유로운 삶의 소유자인 그에게도 못내 말 못하는 걱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음 ‘4대 원장’이다.

 현재 일반대학에 다니고 있는 아들 둘이 있는 그는 누구 하나가 치과의사의 길을 가길 원하지만, 자식들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3대째를 이어 온 중앙치과의원이 앞으로도 계속 운영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부모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라. 저 역시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이 병원이 가업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이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전적으로 아이들의 생각에 달렸다. 저 욕심으로 아이들의 삶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나이가 점점 들수록 이 병원에 애착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자신에서 병원 가업이 마지막이 될까 하는 걱정이 그의 얼굴에 스며 있었다.

 이창수 원장은 "나는 환자를 보는 것이 봉사요. 나만의 프라이드"라며 "아픈 환자를 고쳐주고, 나를 찾아오는 환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성껏 치료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곤 다시 하얀 가운을 입고 환자 곁으로 다가 갔다.

  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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