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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조계란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하고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이다. 조선에 앞서 중국은 이미 남경조약에 의해 광동과 상해 등 5개 항을 개항했는데, 외국인 거주가 실제로 시작되면서 중국인들의 배타적인 태도와 비위생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중국인 또한 오랜 중화사상으로 서양인을 오랑캐라고 멸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인과의 혼거(混居)를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생각, 결국 개항장 안에서 중국이나 외국인 양측이 모두 원하는 ‘외국인 거주구역’ 즉, ‘조계’라고 불리는 제도가 만들어지게 됐다. 이것이 제도로서 확립돼 일본과 조선에 그대로 적용됐다.

 조선은 동양 3국 중 가장 개항이 늦은 나라였고, 조선 개항장에 조계를 설치한 각국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 조계를 설치, 운영한 경험이 있거나 자국 내에서 타국의 조계 운영을 경험한 나라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설정한 조선 내 ‘조계’는 그런 점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조선에 가장 ‘불리한’ 유형이었다.

 인천에서 한국 최초로 ‘각국공동조계장정’이 조인된 것은 1884년 10월 4일이었다. 후일에도 각국 공동조계는 진남포·목포(1897년), 군산·성진·마산(1899년) 등 5개 항구에 개설됐으나 인천을 제외한 5개 각국 조계에 거주한 외국인은 거의가 일본인들이었고 따라서 각국 공동조계라기보다는 일본인 단독 조계와 같았다. 인천의 각국 조계는 인천감리와 영·미·독·청·일 5개국의 대표가 모여 자치기구인 신동공사(紳董公司)를 만들어 각국 조계의 행정권을 집행했다. 단지 토지의 경매가 지지부진해 각국 조계가 정식 출범한 것은 1888년에 이르러서였다.

 신동공사는 조계 내의 사무와 역원, 역부의 임무를 정리했고 각종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과 벌금 부과권도 있었으며 벌금은 모두 조계기금으로 충당됐다. 또한 조계 내의 도로 개설에서 가로등 설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정권을 행사했으며, 특히 건물을 지을 때 자재로는 벽돌, 석재, 철재를 꼭 써야 했고 이를 어기면 벌금을 내도록 엄격히 규제했다. 이에 따라 각국의 공관 건물이나 호텔 등 서양식 건물이 개항장 곳곳에 화려하게 들어서게 됐다.

 각국 조계에 있던 서양인들은 1891년 Chemulpo Club을 만들어 사교적인 모임을 가져오다가 각국공원 입구에 1901년 6월 벽돌 2층 건물을 지어서 옮겨왔다. 인천항을 오가는 외국인들과 조계지 거주민이던 인천해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많이 이용했던 것은 당연했다. 각국 조계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세관원, 영사관원 및 통역관 등이 주를 이뤘고 일반 상인들은 소수였으며 전체 숫자도 많지 않았다. 인천해관에서 근무하는 외국인들의 공식 언어는 영어였고, 각국 조계지는 국제적인 정치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 1번지’일 수밖에 없었다.

 1888년 9월 1일부터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가 인천지점으로 승격했고, 인천부두 선착장도 석축으로 됐으며, 벽돌 3층 건물인 대불호텔이 영업을 시작했다. 1889년 11월 12일 조일통어장정이 조인됐고, 1890년 3월 정미소 사업이 시작돼 인천 공업의 효시가 됐다. 협소한 전관조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조선인 마을과 각국 조계지로 다투어 이주했는데 각국공원 조성 3년 뒤인 1891년에 이르러서는 각국 조계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가 일본조계 거주 일본인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각국 조계의 행정과 공권력에 있어서는 서구인들에게 압도당했고 고액의 지대와 집세를 불과 몇 명밖에 안 되는 서양인에게 지불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의 불만은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을 통해 마침내 조선을 완전 병합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곧바로 개항장 일대의 조계를 모두 철폐하려 들었으나, 토지 등기문제 등 뒤처리가 늦어져 1914년 4월에야 ‘우선적’으로 각국조계를 폐지했다. 이때 신동공사의 조직과 인적 구성, 예산서 등과 같은 자료들을 모두 폐기 처분해 버렸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각국 조계의 역사를 한반도 침략사에서 하나의 수치스러운 사례로 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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