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끽끽. 기름칠한 지 오래돼 두어 번 나눠 열어야 하는 미닫이문. 아침 손님을 맞이한 뒤 고요하던 노포의 문이 열린다. "어머, 여기인가 보다. 호구포식당 맞죠? 우리 부부가 여행 다니면서 특색 있는 가게들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여기 오려고 경기도 오산에서 일부러 소래포구를 여행지로 잡았다니까. 운이 좋네요. 장사를 안 하시면 어떡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무뚝뚝한 사장님은 어서 오라는 한마디 인사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고 주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소래포구 인근 유흥가와 고층 아파트 숲 사이 오래된 골목. 인도가 뭉개져 있을 정도로 개발에서 소외된 탓일까.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다. 하지만 골목 가운데 위치한 ‘호구포식당’은 매일 아침 6시면 불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린다. 안옥순 1대 사장이 2017년 10월 세상을 뜨고 2대 사장인 아들 최태영(60)씨가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

인천시 남동구 호구포식당에서 최태영 사장이 소머리국밥에 들어갈 육수를 끓이고 있다.
# 호구포식당의 태동-동네 이웃 입맛 당기던 손맛

 1938년 달월(현재 시흥시 월곶)에서 태어난 안옥순 씨는 남편과 결혼하면서 다리 건너 호구포마을에 신혼집을 차렸다. 안 씨의 ‘손맛’은 금세 동네에 퍼졌다. 동네에 경사가 났을 때 말아 내놓은 잔치국수가 사람들의 입맛을 당겼다. 먹고사는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식당을 차리기로 한다. 음식 장사를 하면 자식들의 배는 곯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손님들에게 내놓기로 한 음식은 순댓국. 소머리국밥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호구포식당은 1968년 돼지뼈를 우려내며 시작됐다.


 "처음에는 우리 어머니에게 동네 어르신들이 음식 좀 해 달라고 그렇게 성화였어요. 그때는 부녀회라는 개념도 없어서 음식 솜씨 있다는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단체음식을 마련하고 그랬죠. 그러면서 식당을 차렸고, 순댓국집으로 시작했어요. 어머님이 평소 잘 하시던 육개장과 설렁탕도 메뉴에 넣었고, 또 마진이 많이 남는다고 해서 돼지왕갈비에 빈대떡까지 팔았던 시절이 있었어요."

▲ 호구포식당 앞에서 멋쩍게 웃고 있는 최태영 사장.
# 전성기-버스기사들의 사랑방

 1990년대 중반 식당은 지금의 자리로 위치를 옮긴다. 주된 고객이었던 버스기사들을 따라 호구포에서 소래포구로 이전한 것이다. 버스 노선이 개편되며 당시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던 동인천을 오가던 버스의 종점이 바뀌어서다. 식당 이름은 유지했다. 소래포구와 어울리지 않게 옆 동네 이름을 그대로 썼다. 길을 지나던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걸음을 들이게 했을지 모를 일이다. 식당은 이곳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소래역 근처에는 이미 버스회사에서 직원들을 위해 지정한 음식점이 있었다. 하지만 단골이었던 버스기사들은 사비를 쓰더라도 호구포식당에서 한 끼를 먹었다. 특히 안옥순 사장의 손맛과 푸짐한 양은 기사들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과 상인들까지 단골로 만들었다.

호구포식당의 대표 메뉴인 소머리국밥 한상.
 안 사장의 하루 일과는 새벽 2시부터 시작이었다. 2시에 일어나 3시부터 준비하고, 4시가 되면 어김없이 기사들이 찾아왔다.

 "그때 버스회사에서 기사들한테 새벽 3시에 배차표를 나눠 줬다고 하더라고요. 기사들도 그 시간에 출근해서 배고프죠. 그럼 바로 우리 식당으로 와요. 밥도 안 됐는데 들어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한 끼하고 일하러 나가요. 일종의 사랑방이었죠. 지금은 창고로 쓰는 가게 옆 건물이 배차사무실이었거든요."

 최태영 사장은 손님들에게 찬사받던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자랑하면서도, 이제는 맛볼 수 없음에 그리워했다. "손님들이 어머니 요리에 대해 엄청 칭찬했어요. 기사들이 인천시내에서 최고의 요리 실력이라고 했으니까. 당시 기사들은 시내 차고지를 돌아가면서 일해요. 여기저기 식당 다니며 비교를 많이 했겠죠. 우리 어머니 참 음식을 잘 만드셨어. 대충 하신다고 하지만은 조물조물 뚝딱뚝딱 해서 나오는 음식들을 보면… 참 기가 막힌 맛이었죠. 저는 어머니 솜씨를 따라가지 못해서 걱정입니다."

▲ 호구포식당 최태영 사장이 손님에게 낼 국밥을 준비하고 있다.
# 경영 어려움-끊긴 단골과 경영 변화

 2000년대 중반 소래와 논현동에 택지개발이 진행되면서 호구포식당의 운영에도 변화가 생겼다. 단골이던 버스기사들은 버스 종점이 옮겨 가며, 또 다른 단골이었던 한국화약과 염전 직원들은 공장 이전과 염전 폐업으로 발길을 끊었다. 게다가 1대 사장 안옥순 씨가 사망하면서 가게를 찾던 단골들도 줄었다.

 "어머님 보러 오시던 단골이 반 이상 끊겼어요. 2017년 10월에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드셔서 안 아픈 곳이 없으셨죠. 돌아가시기 전날 제가 십정동에 가서 뼈를 사다 담가 놓았는데, 핏물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어머니를 제가 막 혼냈어요. 아시는 분이 수도를 잠그고 계셨느냐고. 그러곤 잠을 잤는데, 아침에 그대로 돌아가셨죠. 가시는 날까지 가게 운영을 하신 거예요. 어머니에게 화를 낸 다음 날 돌아가시니 계속 마음에 남아요."

 아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애꿎은 난롯불을 다시 지폈다. 이어 가게 운영을 잇게 된 당시를 설명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제가 본격적으로 가게 운영을 시작했어요. 가게 이어갈 사람이 없는데, 어머니 손때 묻은 곳을 타인에게 넘기자니 마음이 안 좋아서 해 보겠다고 마음먹었죠. 집 나간 아들이 다시 들어온 거예요. 전에는 전기공사나 도로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식당 일을 거드는 것뿐이었어요. 직접 가게를 시작하고 보니 매출이 안 나오는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준비시간이 길고 식단도 매일 바꿔야 하는 백반 메뉴를 과감히 없애고, 소머리국밥과 육개장만 남겼죠."

# 다짐-자신보다 손님을 위한 식당

 최태영 사장은 호구포식당의 주 메뉴가 된 소머리국밥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특히 진한 국물을 내기 위한 고집이 있다. 원가를 절감하고 뼈를 고아내는 데 손이 덜 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운영 방식은 손님들을 위해서도, 본인과 어머니의 운영 방침과도 맞지 않는다.

 "내 국물은 원재료 그대로 뽑아내요. 진하게 내려고 다른 것 섞지 않고 국물을 내죠. 주변의 입김이라던가 유혹도 많이 있었는데, 넘어가지 않았어요. 봉지에 담긴 것을 뚝배기에 넣어 끓이기만 하면 된다지만 내키지 않죠. 어머니가 하시던 방식과 내가 어깨 너머 배운 것이 있으니까. 공장표 국물을 쓰면 마진이 많이 남고 편할 수 있어도 맛이 달라요. 손님들도 다 아실 거예요. 꼬박 하루가 걸려 뽑아내는 국물을 손님 상에 내놓는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 최태영 사장의 아내 김순득씨가 국밥을 나르고 있다.
 쉬지 않고 일하며 손님들에게 퍼주는 어머니의 방식이 불만이었던 아들은 어느 순간 손님을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의 길을 따르고 있었다. 최 사장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도록 식당을 운영할 생각이다. 손님이 줄어든 식당의 경영 사정은 항상 걱정거리지만, 맛을 유지하고 전통을 지켜갈 것이다.

 그는 최근 노포가 조명받으며 SNS나 블로그 등을 통해 가게를 찾아오는 젊은 손님들이 늘어 새로운 동력도 찾았다.

 "아직 오시는 손님들이 계시니까 정성을 다해서 꾸려 나가야죠. 무뚝뚝한 성격에 손님들께 조금 살갑게 하겠다고 마음먹어도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어느 분이 오셔도 조금이라도 서운하지 않게 서비스부터 나름의 최선을 다할 거예요. 가격도 올리고 싶지 않아요. 이 자리에서는 손님들 생각에 올릴 수도 없어요. 주차공간도 없고, 건물이 낡아 화장실 가는 것도 불편해 하세요. 손님 입장에서 불편한 점이 많은데 찾아주시니 감사하죠. 지금 가격 유지하면서 더 이상 이렇게 팔아서는 밥을 못 먹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는… 이대로 나가다가 안 되면 종 치는 거지 뭐. 하하하."

 장원석 인턴기자 stone@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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