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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사람은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다. 부와 명성, 그리고 권력을 모두 갖추고 있어도 주변 사람들과 냉랭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만족과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정신과 의사인 이무석 선생의 「30년만의 휴식」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저자는 침팬지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어미와 격리된 침팬지 새끼는 우울증에 빠진다고 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미가 오지 않으면 무기력증에 빠져서 허공만 바라본다고 해요. 그러다가 어미가 돌아와도 도대체 반응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난 것을 알면 극심한 상실감과 좌절감에 휩싸여 일상 생활을 온전히 해나가기가 힘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저는 동네친구 두 명과 늘 함께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에 한 번씩은 신기할 정도로 셋 중의 한 명은 따돌림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골목길을 걸어갈 때 두 명은 앞에서 재잘거리며 걸어가고 있고, 조금 떨어진 뒤에서 따돌림을 당한 친구가 고개를 숙이고 따라오고 있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뒤에서 따라오는 한 명 중에 저도 당연히 포함돼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뒤를 따라가는 제 모습을 그려봅니다. 상실감과 절망감, 그리고 두려움이 컸을 겁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관계’ 속에서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부르는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을까요? 재수 시절, 사회 과목 선생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학 시절 선생님은 고시공부를 위해 암자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절인 그곳의 주지 스님은 몸집이 아주 작은 노인이었는데 장난기가 많았나 봅니다. 어느 날, 툇마루에 걸터앉아 따뜻한 봄 햇살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갑자기 목덜미가 간지러워 깼습니다. 눈을 떠보니 스님이 낄낄거리며 달아나는 게 보였습니다. 나뭇잎으로 간지럼을 태운 거였습니다. 스님의 이런 행동에 화도 났고 실망도 컸습니다.

 또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툇마루에 앉아 졸고 있는데, 이번에는 새의 깃털로 그의 귀를 간지럽게 하고는 냉큼 달아나는 스님의 모습을 짜증스럽게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에이, 이놈의 절, 다른 암자로 옮기든지 해야지’라고까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조금 멀리 떨어진 암자에서도 신자들의 웅성거림이 크게 들렸습니다. 마음이 뒤숭숭해진 그가 법당으로 가보니, 대웅전 앞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웬 낯선 스님 한 분이 법당 안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멀리서도 엄청난 카리스마가 느껴졌습니다. 그는 ‘저런 스님이 주지스님이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호기심에 법당 가까이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설법을 하시는 그 스님이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의 목덜미와 귀를 간지럽게 하던 철부지 주지 스님이셨던 겁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스님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요.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암자에 와서 공부는 하지 않고 졸고 있는 모습을 본 스님은 안타까운 마음에서 잎사귀와 깃털로 그의 졸음을 깨운 겁니다. 스님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친구가 되어준 것이지요. 무릎을 꿇려 놓고 꾸중하는 대신에 ‘낄낄’거리며 친구처럼 잠만 깨워준 겁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지금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중들을 가르치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스님으로 바뀌어있는게 아닌가요.

 가만히 그 주지스님을 떠올려 봅니다. 대중들 앞에서는 경건함과 엄격함으로, 그러나 졸고 있는 고시생 앞에서는 친구처럼 대하는 유연함에서 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너’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주는 것, 가르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깨닫게 돕는 것, 이 배려심이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는 해법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지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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