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 없는 전철역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역세권이지만 토지의 용도가 최소한 준주거나 상업용지도 아닌 일반주거지역인 곳이 있을까. 80여 개의 초역세권 점포 중 단 2곳만 북새통이고, 나머지 가게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곳이 있을까.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철역 쪽이 아닌 맞은편으로만 초고층 빌딩들이 매일 새로 들어서는 ‘비균형’의 도시. 이곳이 제물포 역세권의 오늘날 풍광이다.
비록 선인학원이 백파 일가(백선엽·백인엽)의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뼈 아픈 시련을 겪었지만 이 초대형 사학 덕분에 제물포역 인근은 반세기 가까이 학생들과 시민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10년 전 인천대학교가 송도국제도시로 이전하면서 과거의 영광은 삽시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제물포역 북측 출구에 있는 일명 ‘담배골목’에서 44년째 이발관을 운영하고 있는 김충제(65·제물포헤어클럽 대표)제물포상인협동조합 이사장은 "1970∼90년대 이곳은 두발 단속을 피해 아침부터 ‘스포츠 머리’를 깎으려는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회상했다.
당시 김 이사장은 연간 1억 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지금은 한 달에 200여만 원을 번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재개발을 해 주겠다, 주거환경을 개선해 주겠다, 담배골목과 떡볶이골목에 스토리를 담아 역세권을 살려 놓겠다고 수도 없이 약속했지만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나마 담배골목의 도로를 새롭게 포장하고, 폐쇄회로(CC)TV 등을 설치한 게 전부다.
김 이사장의 이발관 바로 옆에서 27년째 꽃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옥영(60·고은하늘꽃 대표)제물포상인연합회장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 회장은 "원도심을 균형발전시킨다며 말로만 하는 정치에 염증이 난다"며 "도로를 가운데 두고 한쪽으로는 높은 건물들이 솟아 있고, 이쪽은 낡고 허름한 가게들과 집들이 수십 년째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게 정말 답답한 도시계획 행정이 아니냐"고 했다.
그는 "이곳 80여 개 점포 중에 그나마 매일 장사를 하는 가게는 현재 40여 개에 불과하다"며 "역세권 재생사업은 지금처럼 야금야금 추진할 게 아니라 ‘통’으로 전체적 구상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고 했다.
한때 제물포역에서 경양식 돈가스를 제공해 큰 인기를 끌었던 라똔커피숍의 전 대표도 인천시와 미추홀구를 비롯해 시교육청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김정덕(60·동산공인중개사사무소 실장)제물포상인연합회 부회장은 "오랜 기간 라똔을 운영하면서 하루 매출액이 140만 원을 찍은 적도 있었다"며 "하지만 인천대 등이 이전하면서 상인들은 속수무책으로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 부회장은 "이곳 점포들 중에서 장사가 잘 되는 곳은 두 곳뿐이고, 나머지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겨워하고 있다"며 "역세권 점포를 얻는 사람들의 용도가 가게가 아니고 사무실이나 창고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그는 제물포 역세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방안도 제시했다. ▶학교정화구역의 기준선을 변경해 다양한 업종의 상권 유치 ▶2종 일반주거지역의 용도를 완화해 용적률 상향으로 사업성 개선 ▶옛 선인학원 입구 쪽 부지를 활용한 주차장 건립 등을 구상했다.
김 부회장은 "침체된 상권에 학교정화구역까지 묶여 있는 제물포역 상권에는 그 흔한 노래방이나 게임(PC)방도 들어올 수 없다"며 "교문 앞 50m, 학교 경계선으로부터 200m 이내에 특정 업종 유치를 제한하는 학교정화구역을 완화하려면 학교 경계선에 있는 운동장을 반대편 부지로 옮기고 현 운동장 부지는 나대지로 변경하면 된다"고 했다. 또 "제물포역사 인근에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공터에 주차장 부지를 만들고, 옛 선인학원 입구 부근의 넓은 땅을 활용해 현 주차장의 대체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시교육청과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이 같은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제물포 역세권 사업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다는 게 김 부회장의 오랜 바람이다.
글·사진=김종국 기자 kjk@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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