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서구 열강의 통상 압박은 인천의 어촌마을에도 빠짐없이 가해졌다. 중구 중앙동과 항동 일대의 한적한 포구는 1883년 개항 이래 말 그대로 천지가 개벽(開闢)됐다. 일본·중국·미국·영국·독일·프랑스인들이 앞다퉈 몰려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삽시간에 신문물의 각축장이 됐다. 그렇게 개항장 일대는 ‘제물포(濟物浦)’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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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제물포역 앞 풍경.
 제물포는 조선시대 수군이 주둔한 제물포진이나 제물량(濟物梁)에서 그 이름이 등장한다. 제물포의 옛 지명인 미추나 매소로 비춰 볼 때 이곳의 지명도 ‘거친 맷골(들판)의 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1884년 제물포에 도착한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제물포는 바닷가의 한 모서리를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초라한 집들의 덩어리였다"고 묘사했다. 1888년 이곳에 도착한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바라는 "각 조계지는 수려한 관아와 길드, 번창하는 상점들로 이어지고 폭죽소리와 징, 북소리로 분주하고 시끄러워 보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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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인천체육전문대학.
이처럼 ‘제물포’라는 이름은 인천 중구에 있던 조선시대의 포구이자 외세가 강제로 개항한 항구의 이름이었다. 이후 ‘제물포’라는 이름은 단순히 포구라는 ‘점’의 개념을 넘어 개항장 일대로 확장돼 ‘면’의 개념을 가졌다. 제물포고등학교의 주변부를 비롯해 경인전철 제물포역의 역명을 제정할 때도, 제물포중·제물포여중 등의 학교명도 이 같은 포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는 제물포역은 1959년 3월 단층 목조건물로 준공돼 그해 7월 1일 개통됐다.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의 말을 빌리자면 도화동(道禾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에 속했고, ‘쑥골(베말)’과 ‘도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쑥골은 ‘벼 마을’이라는 뜻으로 벼를 뜻하는 중세어 ‘쉬’와 마을이나 골짜기를 뜻하는 우리말 골이 붙어 ‘쉬골’이 됐다고 한다. 이것이 다시 ‘수골’, ‘숫골’을 거쳐 지금의 쑥골이 됐다. 도마다리는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일대가 옛날에는 말을 방목하고 훈련시키던 곳이어서 ‘도마(導馬)’라는 이름이 생겼다가 이것이 다시 도마(道馬)가 됐다. 지금의 수봉산 입구 일대에 말이 지나다니는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처럼 도화동은 쑥골과 도마다리를 모태로 하는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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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제물포역 철길. <네이버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 제공>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물포역 북쪽은 논과 미나리꽝(밭)이 있었고, 그 논을 지나면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인천대 제물포캠퍼스가 자리한 도화산은 과거 북망산(北邙山)으로 불렸고, 1930년대에 중국인 공동묘지가 조성됐다가 한국전쟁 후에는 국군묘지(옛 선인체육관 자리)가 조성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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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물포역 주변지역 환경개선 현황
 전후 도화동 일대에는 피란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마을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구릉 위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백선엽(白善燁)과 그의 동생 백인엽(白仁燁)의 이름을 따서 1965년 ‘선인학원’이 세워졌다. 2개 대학, 11개 중·고교, 1개 초교, 1개 유치원 등 총 15개 학교로 인천지역 최대 사학이었다. ‘도봉산(항도·운봉·운산고)’으로 잘 알려진 각 학교 이름도 백 씨 일가의 호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군내 좌경 인사로 분류됐던 박정희(좌익 용의자로 사형선고)전 대통령을 구명한 백선엽은 이후 군사정권의 비호 아래 상상을 초월한 전횡으로 사학비리의 주범이 됐다. 인근 도화동 주민들의 재산 불법 침해와 중국인 공동묘지 침탈, 교사들의 부당 해고, 학생 체벌, 부정 편·입학, 졸업장 판매, 공금횡령 등의 비리가 선인학원에서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학원 정상화운동이 시민사회로까지 들불처럼 번지면서 선인학원은 1994년 결국 해체됐다. 국공립, 시립화의 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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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인천시 미추홀구 제물포역 일대 전경.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당시 인천대에 다녔던 이모(미추홀구·46)씨는 "총학생회를 선두로 매일 아침 선인학원 곳곳과 선화여상 앞 도로를 누비며 백파 퇴진과 학원 정상화를 위해 시위했다"며 "하지만 어렵게 지켜낸 캠퍼스는 아파트촌으로 전락했고, 인천 최대 교육중심지의 아성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김종국 기자 kjk@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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