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으로 아버지가 농사일을 못 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가세가 기울면서 삶이 궁핍해졌다."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와 그 후손들이 모인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기호지부 이규매(70·사진)총무는 13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이 된 부친 이병목 씨(이하 부친)를 회고하면서 당시 열악했던 가정 형편을 털어놨다.

이 총무는 14일부터 이틀 동안 일본 국회의사당과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본보 2월 11일자 22면 보도>를 찾는다. 이번 방문을 통해 이 총무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한(恨)에 대해 호소할 예정이다.

1923년 안성 반재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던 부친은 태평양전쟁 말기 무렵인 1944년 일본 정부에 의해 히로시마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총기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로 끌려갔다. 21살의 젊은 나이였다. 당시 막 결혼해 가정을 꾸렸던 부친은 강제징용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손목을 쓸 수 없고 온몸에 유리 파편이 박히면서 해방 이후 농사조차 지을 수 없었다.

부친이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이유는 마을 이장이 일제에게 제공한 ‘강제징용자 목록’에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해방까지 18개월간 자재를 나르며 노동을 강요당하던 부친은 한 푼의 임금조차 받지 못한 채 격한 육체노동으로 인해 손목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후폭풍이 자재 창고에 떨어지며 전신에 유리 파편이 박히는 등 끔찍한 사고까지 당했다.

이 총무는 "아버지가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버섯구름을 매우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거리에서 후폭풍에 휘말렸다"며 "피폭으로 인한 피부병으로 가려움을 호소하는 한편, 전신에 박힌 유리 파편들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고통을 겪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양쪽 눈이 전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이후 부친은 해방을 맞아 UN군 선박을 통해 안성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손목 등의 고통으로 마을 사람들이 진행하는 품앗이에도 참여하기 어려워 항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총무는 "아버지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허드렛일을 도와가며 품앗이를 받기도 했다"며 "나 역시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비교적 돈을 많이 주는 위험하고 힘든 일만 해 왔다"고 한탄했다.

부친은 2000년 5월 강제징용 피해자 5명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부친이 별세한 날은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참사가 있던 2011년 3월 11일이었다.

이 총무는 "아버지가 숨을 거둘 때까지 원했던 건 보상이 아닌 일본의 만행에 대한 사과"라며 "시간이 더 많이 흘러 강제징용,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모두 생을 마감하기 전에 일본 측의 사과와 보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종현 기자 qw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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