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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옥엽(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현재 문화재청에 등록된 각 지자체의 문화재 중 ‘공원’이란 명칭으로 지정된 사례는 셋이 있다. 1989년 지정된 ‘서울 효창공원’(사적 제330호)과 1991년 지정된 ‘서울 탑골공원’(사적 제354호), 그리고 비교적 근래인 2007년 지정된 ‘부산 재한유엔기념공원’(등록문화재 제359호)이다. 이들 중 조선시대 왕실의 능이 있던 효창원에서 기원한 ‘서울 효창공원’은 김구, 이봉창, 윤봉길, 안중근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공간이고, ‘부산 재한유엔기념공원’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전사자가 안장된 공간으로 유엔에서 지정한 세계 유일의 성지이다.

 이와는 성격이 다른 ‘서울 탑골공원’은 조선시대 원각사터에 세운 근대식 공원으로 파고다 공원이라고도 불린다. 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제2호)과 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있다. 또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팔각정, 독립만세 부조판,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있다. 팔각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3호)과 정문(서울시 문화재자료 제68호)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인천의 자유공원은 어떤가? 인천 개항 전후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제물포 북변, 남변포대가 자리했고 요망대가 있었으며 비록 옮겨갔지만 서해안 방어를 위한 제물진이 위치했던 공간이다.

 더구나 1883년 제물포 개항 후 일본, 청국, 서양 각국인들의 조계지가 조성되면서 응봉산(鷹峰山)을 중심으로 서구식 공원인 ‘Public Garden’을 조성했다(1888). 각국공원,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서공원이라 불렸으며, 1957년 개천절을 맞아 맥아더 장군 동상 제막식을 가지면서 자유공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원 일대는 유무형의 개항을 전후한 시기와 근현대사 흔적이 산재해 있다. 최초의 서구식 주택인 세창양행 숙사 건물은 인천부립도서관, 향토사료관으로도 활용됐고 지금은 9·15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동상과 화단이 자리하고 있다. 맞은편 영국인 사업가 존스톤의 별장 터에는 1882년 5월 22일 각국공원 언덕 위에서 서양과 최초로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00주년을 기념한 탑이 세워져 있다(1982).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클럽인 제물포구락부(인천시 유형문화재 17호)는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문화재로 남아 있다.

 월미도와 인천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2층 규모의 석정루(石汀樓)가 독지가 이후선의 후원으로 세워지면서 1966년 6월 23일 당시 윤갑로(尹甲老) 시장 등 참석한 내외빈의 자취가 기념비와 함께 남아 있다. 그 아래에는 인천 개항 후 조성됐던 청국조계와 일본조계의 경계를 구분했던 청일조계지경계계단(인천시 기념물 51호)이 현존하고 또, 독립운동가 조훈(趙勳)의 뜻에 따라 그 후손이 1960년에 건립한 육각정자인 연오정(然吳亭)도 있다.

 더구나 1919년 3·1운동이 진행되면서 만세운동은 물론,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개최됐던 역사적 장소였다. 이 회의는 홍진(洪震), 이규갑(李奎甲) 등 한성임시정부의 20명에 달하는 각계 대표들이 4월 2일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했던 일종의 ‘의회’ 역할을 한 중요한 회의로 평가되고 있고, 당시 임시정부 통합에 있어 상당한 주도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오세창의 발의로 해방기념탑 건립을 준비하기도 했고(1945.10), 한국전쟁 후 충혼탑을 제막했으며(1953.6), 인천 출신 전몰장병 505위의 합동위령제를 개최했던(1953.11)역사적 공간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학도의용군기념비, 철도 및 세관용지 표지석들은 이러한 시대적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100년 전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를 되새기는 오늘에 자유공원이 갖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새삼 돌이켜본다. 인천특별시대를 여는 중요한 문화자산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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