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김상자입니다. 올해 여든네 살이죠.

 한평생을 구멍가게에서 살아온 제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겠다니 감사하고 또 감사하네요.

 제 고향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입니다. 1957∼58년 무렵이었죠. 서울로 올라왔다가 약혼자에게 큰 시련을 겪고 스무 살 초반에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으로 건너왔죠.

 작은아버지께서는 숭의동에 생긴 ‘자유극장’에 인맥이 있었죠. 작은아버지는 극장 매점을 하던 분과 친했거든요. 작은아버지가 ‘아무개 누나야. 우리 상자 매점에서 일 좀 시켜줘라.’ 이렇게 계속 부탁하신 거죠. 그래서 자유극장 매점 종업원이 됐어요. 한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저였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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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 인광슈퍼에서 김상자 씨가 슈퍼를 운영하면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 극장 매점 종업원

 자유극장이 당시에는 평양옥(1945년 개시한 해장국집) 뒤편에 있었어요. 포구문화와 미군부대(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중·동·미추홀구는 찬란한 영화의 역사를 쓰고 있었죠. 1926년 애관극장을 시작으로 1945년 동방극장, 전후(戰後)에는 미림·문화·인천·현대·오성·인영 등 극장이 우후죽순 생겨났어요. 요즘 말로 ‘시네마 테마거리’인 셈이죠.

 숭의동을 보자면 1958년 장안극장이 개관했고, 옛 공설운동장(축구전용경기장) 옆에는 도원극장이 문을 열었죠. 1961년 5·16 군사정변(쿠데타) 직후에는 성매매 집창촌인 ‘옐로하우스’가 중구에서 이리(숭의동)로 옮겨왔고, 중앙극장이 또 생겼죠. 생각해 보니 숭의로터리에는 세계극장도 있었네요.

 제가 일했던 자유극장은 이 극장들 사이에서 ‘근대 신(新)건축, 최신 문화설비, 사운드 스크린 완비, 화려한 휴게실’을 뽐내며 성황을 이뤘죠.

 

 # 배 곯아 가며 배운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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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 인광슈퍼에서 김상자 씨가 출입문을 닦고 있다.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그렇게 극장 매점에서 장사를 배웠어요. 10원짜리를 주로 만졌죠. 아이스크림이 20원 할 때니까요. 매점 주인은 저에게 가게를 맡겨 놓고 어딘가로 훌쩍 나갈 때가 많았어요. 한창 순진할 때라서 매점 주인이 없으며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다렸죠. 끼니를 거르며 장사를 했어요. 어렵고 낯설고 힘든 시절이었네요.

 극장 옆에 셋집을 얻어서 한 달에 3만 원하는 사글세를 살았어요. 그래도 시원찮은 매점 월급을 꼬박꼬박 모았어요. 한 10년을 거기서 일하니 500만 원이 모아졌어요.

 지금 ‘인광슈퍼(숭의동 403-2)’ 자리에 초가집을 샀지요.

 # 인광상회 시절

 1971년으로 기억해요. 장만한 초가집 한쪽에서는 노점을 하고, 또 한쪽은 살림방으로 썼죠. 간판이라는 게 없던 시절이죠. 큰 소쿠리를 이고 동인천까지 걸어가서 물건을 떼왔어요. 자가용이라는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죠. 지금은 보세요. 이렇게 브랜드별로 대리점 아저씨가 가게로 찾아와서 물건까지 다 진열해 주고 가요. 신제품이 나오면 알아서 가져다 주고요. 참 편하죠.

 그 초가집은 비만 오면 물이 새고 물난리라도 나면 물건들이 죄다 물에 다 잠겼죠. 나라에서 홍수피해를 조사하고 수해 지원을 해 주겠다고 해도 저는 피해 목록을 굳이 작성하지 않았어요. 이 나라에 이렇게 태어나서 저녁 찬거리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가게라고는 저희하고 평양옥하고 이화순대가 전부였죠. 물론 다들 초가집이었고요. 옛 공설운동장 자리는 온통 미나리꽝(밭)이었어요. 가게 뒤로는 폭이 한 3m 되는 개천이 흘렀고요. 그 일대를 ‘독갑다리’라고 불렀어요. 모두들 끼니를 걱정하던 가난한 시절이었죠.

 # ‘미군 돈통’에 수북이 쌓인 지폐

 1980년대는 숭의동 상권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죠. 독갑다리 주변에는 시쳇말로 ‘니나노집(방석집)’이 많았고, 공구 상가들도 생겨나서 우리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많았어요. 야구장도 있었고요. 그때는 가게하는 사람들이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쓰고 남은 실탄 상자를 돈통으로 썼는데, 그 돈통에 지폐가 늘 수북이 쌓여 있었어요. 담배를 사러 오는 손님이 가게로 연신 들어와서 손이 한시도 쉴 틈이 없었지요. 아침 7시에 가게 문을 열고 새벽 2시에 들어가면 새벽 5시까지 잠시 눈을 붙였다가 아이들 아침밥을 챙겨 주고 다시 가게로 나왔죠.

 그러다가 1994년에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바깥양반이 하늘나라로 갔죠. 이북에 친·인척들 주소며 전화번호까지 다 있었지만 살아생전에 이산가족 면회 신청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중앙정부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고 했어요. 바깥양반은 이북에서 글을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여기서 순경도 하고 한약방도 하고 그랬어요.

 가게 이름도 이 양반이 빛 광(光)에 어질 인(仁)을 써서 지었어요. 상회에서 슈퍼라는 간판도 그때 달았어요. 이 양반이 이름을 얼마나 뚝딱뚝딱 짓는지 우리 삼 남매 이름도 다 지어 줬어요. 철학관도 가지 않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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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 인광슈퍼에서 김상자 씨가 출입문을 닦고 있다.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 이웃들은 떠나고 대기업 유통점 들어오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웃들이 하나둘 정든 숭의동을 떠났어요.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됐고, 부천·중동·상동으로도 많이 떠났죠. 동시상영을 하는 삼류 극장으로 쇠락한 자유극장도 간판을 내리고 음료수 공장의 창고가 됐어요. 동인천∼신흥동∼숭의동∼제물포로 이어지는 인천의 중심상권이 쇠퇴기를 맞은 셈이죠. 편의점이 하나둘 들어섰고, 2011년에는 숭의운동장에 홈플러스도 생겼어요. 재개발은 숭의운동장 중심으로만 이뤄졌고, 나머지는 빌라나 도심형생활주택이 난립했어요.

 저는 1980년대에 번 돈으로 가게 옆에 단독주택 하나를 더 샀고요. 삼 남매는 다행히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시집·장가도 잘 갔지요. 장사는 당연히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20∼30년 된 단골손님들이 우리 가게를 잊지 않고 찾아줘요. 참 고마운 분들이죠.

 저는 교회에 빠지지 않고 다니고 있어요. 1960년대 바깥양반 때문에 시작한 종교생활이 이제는 하루도 빠져서는 안 될 소중한 무엇이 됐어요. 그래서 그런지 숭의동에 무슨 신식 가게들이 들어오든 말든 저는 그런 변화에 일일이 신경쓰지는 않아요. ‘쌀을 꾸러 이웃집에 안 가면 된다’, ‘저녁 찬거리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인광상회 시절 각오와 다짐이 몸에 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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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 인광슈퍼에서 김상자 씨가 옛날 송도해수욕장에서 자식들과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며 "슈퍼를 운영하며 아이들을 잘 키워 보람차다"고 말했다.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 팔순 노모 대신 큰아들이 이어간다

 저는 이제 눈도 안 좋고 의사선생님이 심장 때문에 무리를 하면 안 된다고 해서 4년 전 가게를 큰아들(박용현·52)에게 넘겼어요. 아들은 중앙국민학교, 동인천중, 선인고, 인천대 기계공학과를 나온 수재(秀才)죠. 딸들은 직장 특성 때문에 가게를 이어받을 수 없어서 큰아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여기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아들도 나고 자란 숭의동이 편안하고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어머니 가게를 지키겠다고 어려운 결정을 내린 아들이 고마워요.

 제가 건강을 회복해서 아들, 딸, 손주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해야 되는데, 어질게 빛나는 우리 가게처럼 그렇게 다시 찬란하게 빛날 수 있을지 이제는 잘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제 얘기를 들어줘서. 여기 따뜻한 캔커피 하나 먹고 가세요.

 김종국 기자 kjk@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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