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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익 태영 이엔씨 고문
세계적인 석학이자 스탠퍼드대학 교수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옛 소련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는 순간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오랜 기간 파시즘과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얻어진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도전할 수 있는 이념과 철학체계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세계 정치 현실은 그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포퓰리즘 때문이다. 부와 소득 격차 심화, 빈곤 악화로 분노하는 대중들이 희생양을 찾는데 이를 틈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고 반민주주적 언행을 일삼는 포퓰리스트들이 어김없이 등장해 왔다. 다수는 권력을 잡는데 실패했지만 일부는 성공했다.

 실상 포퓰리즘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이 대중을 위한 선심정책으로 국가경제를 파탄시킨 사건 이후부터다.

 당시 페론은 노조의 과도한 임금 인상을 수용하는 등 무분별한 선심성 복지정책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독재정치를 펼쳐 경제파탄을 초래했다. 현재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도 동일한 처지에 놓여 있다.

 한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추진한 기아 퇴치 및 실용주의 노선은 포퓰리즘의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월 소득액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에 정부가 현금을 지원하는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정책을 시행했다. 대통령 임기 동안 빈곤율을 10% 이상 떨어뜨리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듯 포퓰리즘은 양날의 칼과 같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대중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다수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반면 대중영합주의 정책을 통해 특정 집단의 정권 쟁취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거나, 정권 유지를 위해 확고한 가치관이나 기준 없이 비현실적인 정책을 내세운다는 비판도 받는다.

 최근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저서「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그리고 같은 대학 교수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위기 관계를 실증적이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들 석학들은 전 지구적으로 극단적 포퓰리즘을 표방해 선출된 독재자들이 부상해 민주주의를 쇠퇴시키고 있다고 본다. 특히 미국의 경우 극단적 포퓰리스트인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전통을 자랑하는 민주주의조차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내에서는 문재인 정부에 들어 이념적 편향성 강한 포률리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뿐만 아니라 지방교육청이 앞장서서 무상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경제, 사회복지, 교육, 고용노동, 환경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법인세 인상, 부자 증세, 공시지가 급등, 최저임금, 주 52시간 근무, 초·중·고교 학교 무료급식, 교복 및 교과서 무료 제공, 청년 취업준비 수당, 출산 및 영·유아동 수당, 노인수당, 탈원전, 대형 SOC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 종류도 다양하다. 소요되는 예산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포퓰리즘적 정부 정책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망 제공, 부와 소득 재분배와 경제 민주화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일응 설득력과 정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포퓰리즘적 정부 정책이 오히려 규제의 역설에서와 같이 사회계층 간 대립과 갈등을 악화시키고 국정불안의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정권 유지 차원에서 정부 재정으로 무한정 모든 국민생활을 해결할 수 있다는 국가만능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지금은 승자와 패자가 분명한 제로섬 게임(Zero Sum Game)이 아니라 대다수가 승자가 되는 난 제로섬 게임(Non Zero Sum Game)에 정부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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