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 독립운동 역사의 주역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인천시 중구는 청년 김창수를 독립운동가 김구로 성장시키고, 그를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이끈 도시다. 또한 투옥과 탈옥 그리고 축항 노역 과정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본보는 독립운동 증언서라 할 수 있는 「백범일지」를 통해 나타난 김구 선생의 발자취와 향후 추진하는 김구 선생 조명사업에 대해 살펴본다. <편집자 주>
▲ 김구 선생이 투옥했던 인천감리서(왼쪽)와 축항의 노역 모습.
▲ 김구 선생이 투옥됐던 인천감리서(왼쪽)와 축항의 노역 모습.
"인천은 내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곳이다. 스물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물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살에 다시 이 감옥에 이감됐다. 축항 노역을 한 저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땀이 젖어 있는 듯하고, 면회하러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 49년 전 옛날의 기억이 새롭고 감개무량했다."

김구 선생이 1946년 임시정부에서 귀국한 후 38선 이남 지방을 순회하며 가장 먼저 인천 중구를 찾았을 때 한 말이다. 그만큼 그의 삶에서 인천과 중구는 의미 있는 곳 중 하나다.

스물한 살 청년 김창수는 1896년 3월 9일 황해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 쓰지타(土田)를 죽이고 체포돼 인천감리서(중구 내동)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2년 후인 1898년 3월 9일 인천감리서를 탈옥한다. 그는 「백범일지」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훤히 동이 틀 때에 보니 기껏 달아난다는 것이 감리서 바로 뒤 용동 마루턱에 와 있었다. 천주교당의 뾰족집이 보였다.’ 내리교회 인근 용동마루턱에서 바라본 뾰족집은 답동성당으로 추정된다.

‘밤에 탈옥하느라 힘을 썼고, 밤새껏 북성고지 모래밭을 헤맨 후 다시 황혼이 되도록 물 한 모금 못 먹었으니 하늘과 땅이 핑핑 돌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북성고지는 현재의 인천역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구 선생은 1910년 11월 일명 ‘안악 사건’으로 또다시 투옥돼 서울에서 옥살이를 하다 1914년 인천감옥으로 이감된다. 그는 여기서 인천항 제1부두인 축항 공사장에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린다.

김구 선생을 키워 낸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눈물과 한숨이 배어 있는 곳도 중구다. 인천감리서로 이감된 김구 선생을 따라 인천에서 옥바라지를 한 곽 여사는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 "경기 감사가 된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용기를 북돋우며, 감리서 인근 객줏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백범일지」는 ‘어머니는 감리서 삼문 밖 개성사람 박영문의 집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시고 식모로 들어가셔서 이 자식의 목숨을 살리시려 하셨다. 당시 인천항에서 유명한 물상객주로 살림이 크기 때문에 식모, 침모의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하시는 값으로 하루 삼시 내게 밥을 들이게 하였다’고 회고한다.

당시 보부상이 머물던 객줏집은 아직도 일부 남아 있는데, ‘월아천(月牙泉)’이라는 음식점이 당시 곽 여사가 머물던 객줏집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측이 있다. 이처럼 중구는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숨결이 묻어 있는 도시다.

한동식 기자 dshan@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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