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포화가 멈춘 1953년, 도시는 산산이 조각난 삶을 다시 추슬렀다. 관공서를 비롯한 유관기관은 일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이 휩쓸고 간 시골 한구석, 강화로 출근하는 직원들의 끼니를 해결해 줄 식당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강화는 외딴섬이었다. 김포를 잇는 다리조차 없던 터라 섬 바깥으로 나가서 식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시절 강화군의 ‘우리옥’은 군청과 경찰서, 교육청, 문화원 등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점심 한 끼를 차려 주면서 입소문을 탔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손님들은 어머니의 손맛을 추억하며 우리옥을 찾는다.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면에 위치한 우리옥 식당에서 방영순 사장이 손님들이 벽에 쓰고 간 낙서를 보여주고 있다.
# "밥 먹으러 ‘우리 집’ 가자"가 ‘우리옥’으로

 "우리 집 자랑거리가 뭐냐고? 그딴 건 없어. 그냥 집에서 먹는 것처럼 하는 거야. 내 손으로 기른 김칫거리에서 단맛이 나. 고춧가루도 우리가 직접 빻은 것을 쓰거든. 고추장도 집에서 쑤고, 된장도 직접 담그고, 황석어 젓갈도 집에서 삭혀. 액젓도 넣지 않고, 시금치도 밭에서 금세 뽑아다가 써. 서울 같은 데는 재료를 유통하는 데 시간이 걸리잖아. 우리는 텃밭에서 바로 뽑아다 쓰니까 신선한 거야. 우리 할아버지(남편)가 다 농사 짓거든." 가게의 자랑이 뭐냐는 질문에 2대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방영순(78)할머니의 대답이다.


 한(韓)식당 ‘우리옥(강화군 강화읍 신문리)’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오래된 백반 집이다.

 방 할머니의 고모인 고(故) 방숙자 씨가 1953년부터 근처의 공무원들과 문화원 직원들에게 집밥을 차려 주기 시작한 것이 우리옥의 모태다. 당시 고모와 친분이 있던 유지영 씨는 강화문화관장이었는데, 점심 때마다 사람들을 고모네로 이끌면서 "식사하러 ‘우리 집’ 갑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붙여진 ‘우리 집’이란 별명은 실제 음식업 허가가 나면서 ‘집’ 대신 ‘옥’자를 써 ‘우리옥’이 됐다.

# 부모의 자리 메워 준 고모

▲ 지난 24일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면에 위치한 우리옥 식당에서 방영순 사장이 손님들에게 대접할 반찬을 만들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모님이 우리 때문에 희생한 거야. 예전에는 그걸 느끼지 못했거든. 아버지는 중학교 1학년 때인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 전에 세상을 뜨셨어. 30대인 고모가 나와 친언니, 사촌동생까지 키운 거야. 우리 고모님도 결혼은 했었는데 슬하에 자식 없이 혼자 되셨거든. 당신이 희생하면서 오빠 자식들을 돌본 거지."

 방 할머니는 고모의 지극정성으로 자랐다. 고모는 아침마다 조카들의 세숫물을 떠다 바쳤다. 식당을 하면서도 부엌에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손이 바빠도 설거지를 시키는 일이 없었다.

 다만, 음식 하는 방법은 귀가 닳도록 알려 줬다. 각종 밑반찬부터 시작해 장아찌를 만드는 법까지 당신의 모든 노하우를 전했다. 나중에 방 할머니와 그의 언니가 결혼한 뒤 ‘부모 없이 자라 음식을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방 할머니는 솔직히 어릴 때 세상을 떠난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는 고모로 가득 채워져 있다. 고모는 방 할머니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은 아이들에게 공부 대신 일을 시켰어. 하지만 우리 고모는 달랐지. 우리가 공부를 해야지만 공부하는 남자를 만난다고 생각하셨어. 비록 우리 고모가 공부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각별했던 거야.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가게를 새로 샀는데, 그때는 은행이 없으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렸어. 그런데 당시 빌린 돈으로 내 입학금을 먼저 내셨어. 입학금은 시기를 놓치면 안 되잖아. 가게 마련 자금 대신 학교를 보낸 거야. 나중에 말씀하시더라고. 까딱하면 가게를 못 얻을 뻔했다고. 힘들었다고."

 그렇게 공부를 마친 방 할머니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조양방직에서 경리 일을 봤다. 그러다가 세월은 방 할머니를 고모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 어머니의 맛 가득한 백반 한 상

 고모는 1906년생이셨다.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몸은 고장이 나기 시작했고, 누군가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세월의 더께는 방 할머니를 가게로 오게 했다. 고모의 가게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았고, 병상에 있던 6~7년 동안은 조카가 고모의 곁에 함께 했다. 방 할머니가 마흔을 바라보기 전 자연스럽게 우리옥에서는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우리옥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마솥 밥뿐이다. 2008년 새 건물을 짓기 전까지만 해도 큰 가마솥에서 하는 밥과 누룽지가 손님상에 차려졌다.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하는 단골손님들도 있다.

▲ 우리옥 식당의 대표 메뉴인 대구찌개 한 상.
 밥과 반찬에 깃든 어머니의 손맛은 예전 그대로다. 순무김치와 버섯볶음, 고추절임, 배추김치, 젓갈, 콩나물무침, 꽁치조림, 각종 나물무침에는 어머니의 맛이 그득하다. 조개가 들어간 시원한 미역국과 담백한 비지 역시 숟가락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 한 상 차림이 6천 원이다. 특별한 요리는 없지만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만드는 백반 한 상이다.

 이 외에 추가 메뉴가 있다. 둘이 와서 백반 2인분과 5천 원짜리 대구찌개 ‘소’자를 먹으면 1만7천 원이다. 한 번 먹으면 또다시 시키게 된다는 병어찌개도 단골들만의 주 메뉴이고, 불고기와 간장게장도 추가 요금을 내면 먹을 수 있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옥의 효자는 백반과 대구찌개다.

 

▲ 방영순 우리옥 사장이 지난 24일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면에 위치한 식당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딸 둘에 아들이 하나 있어. 이제 그만두라고 하지. 그러면 얘기해. ‘그만두면 뭘 하라고? 그만두란 말 하지 말라.’ 기한 없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하는 거야. 아침 7시 반에 문 열고 저녁 8시 반에 문을 닫지. 특별한 일이 없고서는 명절 때만 쉬어. 다 고모님께 배운 거야. 밥이나 한 끼 먹고 가."

 투박한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있는 반찬들과 스테인레스 그릇에 담긴 고봉 콩밥은 배가 든든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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