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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훈 경기본사 경제문화부장
한참을 망설였다. "내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이 한 줄을 써낸 뒤에도 또다시 망설였다. 망자에게 누를 끼치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본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준호 경기도립국악단 전(前) 예술감독. 그가 고인(故人)이 됐다. 그 시점에는 미처 몰랐다. 지난달 22일 돌아간 그의 소식을 들은 건 발인이 3일가량 지난 수요일이었다. 점심식사를 하던 중 접한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마음은 계속 아팠다. 사인(死因)이 심장마비라고 머릿속에 입력됐을 때 주변에 계속 떠오르는 단어는 ‘도대체 왜, 도대체 왜, 도대체 왜’였다.

 의학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국악계 ‘진짜 실력자’가 졌다는 안타까움이 마침표가 아닌 끝나지 않는 물음표를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15세 내외의 차이가 나는 그. 2004년 말께 도립국악단에서 KBS국악관현악단으로 옮겼으니, 10년여 이상 따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하진 않았다. 간혹 안부를 묻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고(訃告)가 충격적으로 다가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살다 보면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다. 오랫동안 꾸준한 만남을 이어가는 데에도 어색한 사람이 있는 반면,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인상적인 사람이 있다. 단 한 번은 아니지만 그가 그랬다. 돌이켜 보면 웃음이 났고 언제든 다시 만나면 반길, 그런 사람이다.

 예술감독과 기자란 직함으로 첫 인연을 맺었지만 그의 친화력은 곧 형동생처럼, 때론 삼촌조카처럼 쓸데없는 격을 없앴다. 낭만적인 낮술 한 잔도 함께 해 봤고, 저녁이 돼서는 노래방에서 목청껏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한 번은 록 종류의 음악을 먼저 불렀더니 ‘이것 봐라’하는 표정으로 본인도 강한 사운드의 음악을 골라 기를 꺾으려는(?) 순수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추억이 아니더라도, 그의 업적만으로도 그를 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지휘자로서 그는 도내 국악계뿐 아니라 전국에까지 국악의 대중화를 선도해 온 인물이다. 적어도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수예술, 그것도 젊은 세대에게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은 국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대중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기억나는 공연 하나가 있다. 당시 도립국악단 자체를 잘 알지 못한 상황에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열린 공연을 보러 갔을 때였다. 국악 공연에 만석인 객석에 한 번 놀랐고, 그가 등장했을 때 요즘 아이돌의 인기 부럽지 않은 환호와 박수가 터졌을 때 의아했다. ‘국악 공연인데 무슨 일이지?’ 그를 알고 난 후 이해가 갔다. 그의 노력은 가시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경기도립예술단 산하 4개 예술단 가운데 유일하게 전문 공연장(경기도국악당)까지 지어졌다. 도립국악단 예술감독으로서 뿐 아니라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의 연주자로서도, 그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는 도립국악단을 떠날 당시 섭섭한 마음을 토로하면서도 경기도 국악에 관한 애정만큼은 여전함을 드러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도립이란 아이덴티티를 명확히 일궈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순수예술의 본질을 생각하고 예술단이 지향해야 하는 바를 정확히 설정해야 하는데, (시스템상)그러질 못했다. 어려운 건 다 마찬가지이지만 행정적 지원과 예술적 가치의 이상적 결합에 못내 미련이 남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십여 년 전 언급한 이 말을 등에 업고 도립예술단을 바라 보니 측은함은 더하다. 또 하나, 그의 말문이 떠오른다. "지휘자는 객(客)일 뿐입니다. 또 다른 단체로의 여정을 떠나는 거죠."

 아마도 그는 이제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한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너무 일찍 떠났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돌아가셨다’는 의미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그저 번뇌는 훌훌 털어 버리고 미소가 멋진 얼굴만큼이나 그렇게 평온함이 영원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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