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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못생긴 산속의 나무는 거들떠보는 이가 한 사람도 없지만 제 생긴 그대로 살아간다. 어여쁜 새는 조롱 속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만 좁은 새장 안에서 주는 모이만 먹다가 생을 마친다."

 안도현 시인의 「나는 당신입니다」에 인용된 정민 씨의 글입니다. 새장 밖을 나와 훤히 트인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누구나 꿈꾸겠지요. 그러나 그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을 안아야만 합니다. 무한경쟁 속에서 먹이를 구해야 하고, 무더위와 강추위를 이겨내야만 하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늘 긴장하면서 동시에 힘을 길러야 하는 고통을 감내할 때 비로소 자유의 주인이 되니까요. 그러나 새장 속의 새는 그런 고통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주인이 먹이를 넣어줄 것이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은 튼튼한 창살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대신 창공을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는 포기해야 합니다. 삶은 매순간 선택의 연속입니다. 자유와 위험이냐 아니면 속박과 안전이냐, 이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선택한 그대로 우리는 그 환경에 적응돼 살게 될 겁니다. 그 선택은 물론 각자의 몫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장자」에 나옵니다. 어느 날 장자가 낚시를 하고 있는데, 초나라 왕이 보낸 대신들이 와서 나랏일을 맡기고 싶다는 왕의 의중을 피력합니다. 그때 장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초나라에는 죽은 지 3천 년이나 된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귀한 천에 싸인 채 상자에 담겨 묘당에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고 들었소. 그런데 그 거북이 자신도 자기가 죽어서 그렇게 소중하게 받들어지기를 바랄까요? 아니면 살아서 비록 지저분한 흙탕물 속일지라도 꼬리를 질질 끌면서 돌아다니기를 바랄까요?"

 한 대신이 "그야 죽지 않고 오히려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를 바라겠지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자는 "이제 어서 돌아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는 자유로운 거북이로 살고 싶으니까"라며 대신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새장 속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노예와도 같은 새보다는 비록 위험이 상존하는 새장 밖 생활이라고 해도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은 새가 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챔피언을 지낸 권투선수 홍수환 씨의 아픈 고백이 「물속의 물고기도 목이 마르다」라는 책에 소개돼 있습니다.

 "지금까지 링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는 인생이 링보다 더 무서운 곳이란 생각이 든다. 링에서는 두들겨 맞아 그로기 상태가 되면 말려주는 사람이 있지만, 인생에서는 맞고 떨어지면 모두가 아예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

 맞는 것 같습니다. 링 안에서는 심판이나 코치가 선수를 보호하지만 우리들 삶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외롭고 더 아픕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삶이 그토록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어쩌면 ‘새장 문을 열기 위한 노력에 따른 고통’이라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에게 박노해 시인은 ‘너의 하늘을 보아’라는 시를 통해 위로하고 있습니다.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참 힘든 시기입니다. 경제문제, 취업문제, 북핵문제에다가 미세먼지까지 겹쳐서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울 만큼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어느 날 새장 문을 박차고 창공을 향해 자유롭게 비상하는 기적 같은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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