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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재 옛 명성은 빛바랬지만… 장인의 명작은 멈추지 않는다

중구 ‘신라라사’

이승훈 기자 hun@kihoilbo.co.kr 2019년 03월 15일 금요일 제15면

▲ 김억규 신라라사 대표가 인천시 중구 경동의 양복점에서 자신이 만든 양복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54년 인천시 중구의 한 길목에 최초로 항도백화점이 들어섰다. 1961년에는 이 길목에 인천 최초로 신호등이 켜졌다. 인천의 최초가 깃들고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였던 이 길목이 바로 ‘싸리재(경동)’이다.

 싸리재는 중구 경동사거리에서 배다리로 가는 길목이다. 예전 고갯마루에 싸리나무가 많아 ‘싸리재 거리’라 불리기도 했고, ‘축현(杻峴)’으로 쓰였다. 싸리재는 부천을 지나 서울로 가는 관문이었다.

 당시 싸리재의 명성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싸리재 길은 1900년 이전에 세워진 애관극장(협률사)에서 한국 최고의 연극과 공연들이 열렸고, 전국에서 유명 예술인들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당연히 정계 인사와 이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전국구 건달들까지도 싸리재를 제 집 드나들 듯 찾아왔다. 그때는 예술가의 거리로도 불렸고, 또 다른 때에는 약국 거리와 양복점 거리 등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싸리재의 명성과 함께 한 ‘신라라사’ 2대 김억규(68)사장이 옛 기억들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신라라사는 1960년대 1대 김규성 사장이 문을 연 고급 양복점(수제 맞춤)이다. 2대 김억규 사장은 재단 기술자로 신라라사 초기부터 현재까지 40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땐 요즘처럼 전문학원에 가서 체계적으로 기술만 배우지 못하는 시절이었어. 당시 양복 디자인을 해야 하는데, 필요한 연필(초크) 깎는 방법부터 어깨 너머로 배워야 했지. 1년 정도 지나고 나서야 겨우 일류 기능사들이 내가 깎은 연필을 쓰는 수준이 된 거지."

 김 사장은 1960∼70년대 ‘인천의 종로’라 불리던 경동 신라라사에 20여 명의 직원들이 있었다고 되뇌였다. 당시 치수를 재고(채촌), 패턴을 짜고(재단), 우와기(상·하의 제작)하는 기술자들이 분야별 최고(일류)였다. 양복점은 도급제로 운영됐다. 일류 기능사가 만드는 양복값은 당시 공무원 월급의 두세 배는 족히 넘었다.

▲ 인천시 중구 경동에 위치한 신라라사 전경.
 그는 "1대 사장님도 일류 기능사를 서울에서 데려오기 위해 경동 인근에 전셋집까지 구해 줬어. 그런 이유로 당시 기를 쓰고 일류 재단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여기까지 오게 됐지"라고 웃어 보였다.

 당시 싸리재 경동거리에 국내 은행지점들이 마구 들어섰다. 당시 조흥·제일은행 등 주변으로 없는 은행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면서 은행 임원들이 새로운 단골손님이 됐다.

 특히 중구 사동에 있던 인천상공회의소와 배다리 건너기 전 길목 상업은행 임원들 역시 신라라사의 오랜 단골이다. 그 당시 백화점 티켓보다 양복 티켓이 더 유행하기도 했다.

 싸리재가 양복점으로 더욱 유명해진 시기는 1980년에 접어들면서다. 한때 애관극장에는 당대 스타인 신성일과 엄앵란 등 유명 배우들의 무대인사가 열리기도 했고 미스터 유니버스 선발대회, 취업 알선 설명회 등까지 열리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주말이면 인천 최고의 결혼식장이던 ‘신신예식장’의 하객들로 싸리재는 교통이 마비되기 일쑤였다. 인천에서 좀 산다는 사람들은 신신예식장을 찾았다. 예복 역시 경동거리 양복점에서 하는 것이 으뜸이었다. 그 당시 웨딩 열풍이 불어 이 거리에 한복집, 사진관 등 관련 점포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 시설 신라라사를 찾아 인연을 맺은 고객들은 아직도 이곳을 찾고 있다.

 멋드러진 양복 하나쯤 입는 건 남성들의 로망이었다. 양복 상의의 안주머니를 열 때 ‘신라라사’ 상호는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30여 년 전 20살의 한 청년이 취직 면접에 입고 갈 양복을 맞추러 신라라사를 찾았다. 인천의 유명 양복점에 온 까닭인지 취업준비생의 긴장감은 치수를 재는 재단사에게까지 그대로 전달됐다. 그런 첫 양복을 맞추는 손님에게 김 사장은 조금 더 신경을 썼다. 그런 손님이 현재도 신라라사를 찾는다. 사회초년생이던 20살 청년이 지금은 어엿한 중견기업의 사장이 됐다. 그 청년의 결혼 예복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임원들의 고급스러운 양복들도 김 사장 손으로 제작됐다.

▲ 양복을 만들며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가위와 다리미.
 하지만 김 사장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싸리재의 옛 명성은 무너진 상황인데다 수제 양복점의 명맥이 사라져 가고 있어서다. 양복점 운영도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1980년대 후반 기성 양복 등이 시장을 점유하면서 처음으로 맞춤 양복점 업계가 위기를 맞았다. 특히 1990년대 IMF 외환위기 사태로 그 많던 양복점들이 문을 닫았다. 요즘은 기존 기성복 제작과 비슷한 방식의 ‘맞춤 정장’ 집들도 생겨나 수제 맞춤 양복의 명성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그는 "30년 전께 내 밑에서 배우던 제자 한 명을 기성 양복 회사에 취업하도록 도왔지. 제자가 회사일로 힘들어하면 가끔 도와주곤 했는데, 그때 제 무덤을 판 듯해"라고 농담을 던졌다.

 

▲ 지난 11일 인천시 중구 경동의 양복점에서 손님의 양복을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는 김 대표.
이어 "그래도 가끔 40여 년 만에 이민을 떠났던 손님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수십 년 동안 단골이던 손님들이 외국 바이어를 소개해 일본·중국 손님들도 생겼지. 2014년 인천에서 아시아게임이 열렸을 때 옌토마즈 세계역도연맹회장(터키)이 한국역도연맹의 소개로 왔다가 두 벌을 더 맞춰서 가더라고. 옷이 마음에 든다고 어찌나 과한 찬사를 보내던지 쑥스럽다는 생각만 들었어"라고 멋쩍어 했다.

 김억규 사장은 비록 신라라사의 재단기술을 전수해 명맥을 이어나가기 힘든 상황이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오늘도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로 명작을 제작한다.  

이승훈 기자 hun@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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