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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감추는 것도 어렵지만, 없는 마음을 꾸며내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는 것과 사랑하는 척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괴로울까? 둘 다 상당한 고역이겠지만 감정을 가장해 잇속을 챙길 수 있다면 정도의 차이일 뿐 사랑하는 척, 존경하는 척, 감사하는 척하는 거짓 가면을 쓸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는 사랑과 욕망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흥미롭게 다룬 작품이다. 18세기 영국에 실존했던 여인들인 사라 제닝스와 애비게일 힐은 더 많은 권세를 얻기 위해 앤 여왕의 환심을 사야만 했다.

 절대 권력을 지닌 히스테릭한 여왕 앤은 결핍이 많은 사람이다. 선대 왕이 후손 없이 숨지자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던 앤은 결국 국가의 수장이 되지만, 왕이 되기 전까지 그녀는 왕위 경쟁자라는 이유로 18세에 덴마크로 보내졌다. 결혼 후 18번이나 임신했지만 대부분 유산됐고, 그나마 태어난 몇몇마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남편마저 숨을 거뒀고, 그녀는 남은 일생을 외로움과 통풍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앤 여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비만했던 군주로도 꼽히는데, 불어난 체중의 원인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어야 했던 상실감을 음식으로 채우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외적으로는 여왕으로서의 위엄과 체통을 지키려 했지만 그녀의 내면은 여리고 변덕스러웠다.

 공작부인 사라 제닝스는 앤 여왕의 소꿉친구로 그녀의 지난날을 모두 알고 있는 최측근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여왕을 대신해 국내 정치를 장악한 사라는 당근과 채찍을 섞어 가며 앤의 허기진 감정을 지배했다.

 하지만 신분 상승의 욕망을 품은 애비게일이 왕실 하녀로 들어오면서 균형은 깨진다. 엄격했던 사라와 달리 다정한 말로 공감해 주는 애비게일은 여왕이 새롭게 총애하는 인물로 급부상한다. 그렇게 애비게일의 힘이 강해질수록 사라의 영향력은 약화됐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사라는 여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여왕은 사라와 애비게일이 자신의 환심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모양새가 싫지만은 않았다. 결국 팽팽했던 줄다리기는 애비게일의 승리로 마무리됐고 그녀는 왕실의 2인자가 된다. 하지만 애비게일 이전에 사라가 있었듯, 모든 자리는 영원할 수 없었다. 영화는 애비게일 또한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음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영화 ‘더 페이버릿’은 특정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이는 지난 한때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랑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시대를 초월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한 여인들의 암투는 올리비아 콜맨, 레이첼 와이즈, 엠마 왓슨의 탁월한 연기로 인상 깊게 펼쳐진다.

 그러나 잔향처럼 오래 남는 감정은 사랑을 갈구하는 여왕이 경험하는 기묘한 슬픔이다.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그 감정이 진심이라 생각하고 싶은 집착. 거짓 사랑이 위협받기 전까지 누리는 2인자들의 모든 권력은 감정노동에 대한 등가교환일 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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