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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동
인천시 미추홀구 관내에 문학산성(미추홀성·비류성)이 있다. 미추홀구, 남동구, 연수구에 걸쳐 있는 문학산성은 고고학·역사지리학적으로 중요성을 갖고 있는 산성이었다. 고조선, 한나라,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에 이어 최근까지 군사기지로 사용됐다. 적의 동향을 잘 포착할 수 있으며 긴급상황을 빨리 알릴 수 있는 위치라 군사기지로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미추홀구 문학산성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동구, 서쪽의 연수구 청량산에 이르는 곳에 시대별 유적과 유물이 나온 지역이다. 지석묘, 패총, 돌도끼, 숫돌, 한나라 시대 유물, 삼국시대 유물, 고려시대 유물 등이 대량 발견되기도 했다. 연수구 청량산에서는 한조현이라는 지명의 문자도 발견됐다.

 본인의 비견으로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학산성은 우리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최고의 산성 중 하나라고 단정하고 싶다.

 문학산성은 발권형(바리때 : 절에서 사용하는 밥그릇) 모양의 성곽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산성 안에는 숙소, 창고, 비류왕 우물 등이 있으며 문학산성 동문 밖 나지막한 언덕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이 사용하던 왜성이 존재하고 있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문학산성은 비류왕이 분개하며 숨졌다고 해 애분성이라고도 불렀다. 고구려의 지명 미추홀과 함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문학산성에 비류왕이 찾아 온 시기는 약관의 나이 무렵인 단기 2316년이었다. 고구려산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한 주몽은 나이가 20세였다.

 나라를 개국하기 전 낳은 주몽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살해의 위험을 느낀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의 수도 졸본부여를 떠나 남쪽지방으로 나라를 건국할 곳을 찾아 내려와 서울(위례)에 도착해 북한산(삼각산)백운대에 올라 지세를 살폈다. 비류는 멀리 인천 바다가 보이는 미추홀을 선택하고 온조는 서울을 선택하게 된다. 인천 미추홀에 내려온 비류는 여러 곳을 살펴 보던 중 동남쪽 방향에 있는 문학산에 벽루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한다. 그러나 나라를 건국하겠다는 꿈을 갖고 선택한 인천 미추홀은 나라를 경영할 모든 여건이 나쁘고 농사를 지을 땅과 물도 좋지 않아 오래가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비류왕국의 역사와 자취가 있는 문학산성의 시굴조사 연구가 3월부터 시작됐다. 미추홀구가 외부의 문화재 조사연구기관에 의뢰해 문학산성이 축성된 시기 등을 종합적으로 조사연구하게 된다. 조사연구에 따라 종합정비계획도 세운다는 것이다.

 인천시가 나서서 했어야 할 일을 미추홀구에서 미추홀이라는 고구려 지명을 사용하는데 있어 근저지였다고 할 수 있는 문학산성에 관심을 갖고 문화재 조사연구를 시작으로 종합적 정비계획은 미추홀구, 남동구, 연수구 공동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류왕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문학산성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동구, 서쪽의 연수구에서 많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공동으로 정비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아 보인다.

 문학산성의 종합정비계획에 있어 핵심이 되는 비류왕릉의 위치는 연수구 관내에 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문헌적으로나 구전으로도 전해지는 비류왕릉은 문학산성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지금의 연수구 해안가 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인천시립박물관과 지역학계에서는 비류왕릉 위치를 확인하고 복원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미추홀구에서 큰 마음을 갖고 역사적 유적의 보존과 복원을 위해 실시하는 문학산성 시굴조사 연구의 목적과 종합정비 계획의 범위에는 꼭 비류왕릉 찾기와 복원이 있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발굴 조사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비류왕릉 위치를 찾아서 복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비각이라도 세워 놓아야 문학산성 복원의 취지도 살리는 일이며 비류왕 시기의 인천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는 일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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