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북미정상회담(2월 27∼28, 하노이) 결렬 이후 팽팽한 기싸움을 하고 있는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재개해 합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핵화'의 일치된 정의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3월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별사절단을 만나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밝힌 이후 주장해온 '한반도 비핵화'와 미국이 말하는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의 간극을 이제는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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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미정상회담 결렬, 고민하는 김정은 (PG) /연합뉴스
외교부는 1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자료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유에 대해 미국은 ▲비핵화 정의에 대한 합의 ▲모든 대량살상무기 및 미사일 프로그램 동결 ▲로드맵 도출에 우선순위를 둔 데 반해, 북측은 현 단계에서 이행 가능한 비핵화 조치에 집중했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미국이 우선순위를 뒀다는 '비핵화 정의에 대한 합의'는 작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북미 협상 과정에서 어떤 이유에서건 미뤄왔던 '본질적 질문'에 대한 것이라고 외교가는 보고 있다.

자칭 '핵무력 완성국가'인 북한이 지난달 정상회담때 제시한 '영변'과 같은 핵물질 생산시설 뿐 아니라, 만들어 놓은 핵무기와 핵물질 등 이른바 '보유핵'까지 폐기하겠다는 약속을 문서화해야 향후 프로세스가 진행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작년 3월 남측 특사들에게 '비핵화 의지'를 피력했고, 그것을 작년 4·27 남북정상회담 합의인 판문점 선언상에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는 표현으로 구체화했다. 이어 6·12 1차 북미정상회담 합의문에 '조선반도(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하여 노력할 것을 확약했다'는 문구를 담았다.

또 김 위원장은 지난해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남측 특사단에 "이 땅을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며 자신의 의지"라고 말했고, 같은 달 남북정상회담후 전세계에 생중계된 공동 기자회견에서 "조선반도(한반도)를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확약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핵보유국'임을 헌법에 명시하기까지 했던 김 위원장이 자신이 언급한 '완전한 비핵화'에 보유한 핵무기와 핵물질의 폐기까지 포함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히거나, 합의문에 명시한 적은 없다. 그리고 '핵무기없는 한반도'를 언급했지만 그것을 자국의 핵폐기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미 수교 등을 통해 구현하겠다는 뜻인지, '핵군축' 협상을 통해 미국과 상호 핵무력을 없애는 방식으로 달성하겠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물론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전, 남북합의와 6자회담 합의를 통해 비핵화의 개념을 구체화한 적이 있다.

1992년 발효한 남북합의인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은 "남과 북은 핵무기를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配備), 사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하며 핵 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2005년 북핵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했다'는 문안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는 김정은 위원장의 선대에 이뤄진 일이자, 북한이 핵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이뤄진 합의다. 때문에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밝힌 김 위원장이 현 상황에서 구상하는 비핵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비로소 주고받기가 가능하다는게 미국의 인식인 것으로 보인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19일 "1992년 남북간의 비핵화공동선언이나 2005년 9·19공동성명을 보면 북한이 '비핵국가'가 된다는 게 골자인데 북한이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하려면 이를 받아들이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또 2차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최우선 요구가 대북 제재 완화임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제재 완화를 비핵화 어느 단계와 결합시킬지가 또 하나의 중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18일(현지시간) 캔자스주(州) 지역 언론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북미정상회담이 기대만큼 진전을 이루지 못한 이유에 대해 "시기(timing)와 순서배열(sequencing)을 둘러싼, 그리고 우리가 이를 어떻게 달성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분명히 여러 이슈가 있었다"고 답했다. 여기서 순서배열의 핵심은 결국 북한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제재 완화를 어느 정도 수준의 비핵화 조치와 연결하느냐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북한은 하노이에서 내세운 '영변 핵시설 폐기 대(對) 민수용 제재 다섯건 해제' 방안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며, 미국은 그 정도 수준의 제재 완화를 받으려면 북한이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이른바 '영변 폐기 플러스알파(+α)'를 요구하고 있어 현재로선 접점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핵시설 폐기→신고 및 검증→핵무기·물질 폐기 등의 단계를 거칠 수 밖에 없는 만큼 대북 제재도 비핵화 단계별로 나눠 점진적으로 해제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온다.

이와 관련,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8일 국회에서 '비핵화를 이행하는 데 있어서 미국의 상응 조치로 단계별로 제재를 완화하는 안(案)이 이번 협상에서 죽어버렸느냐'는 더불어민주당 이수혁 의원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미국이 비핵화의 상응조치 중 하나인 대북제재 완화를 단계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됐다. 미국이 직접 밝힌 입장은 아니지만 한미간 소통 과정에서 파악한 미국의 인식을 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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