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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수명’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백년을 사는 인간은 ‘금수저’이고, 하루살이는 ‘흙수저’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정호승 시인은 「위안」에서 ‘하루살이는 하루만 사는데 불행히도 하루 종일 비가 올 때가 있다고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가 잠시 하루살이가 돼 봤습니다.

 오랜 세월을 두껍고 어두운 껍질 속에 갇혀 살았습니다. 춥고 무서웠고 외로웠습니다. 대화를 나눌 대상이 너무나도 그리웠습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껍질을 깨고 하늘로 날아가 파란 하늘을 만나고 멋진 짝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런 날이 왔습니다. 딱딱한 껍질을 깨려고 몸부림쳤습니다. 많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깨지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깨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파란 하늘과 사랑하는 짝을 만나야 하니까요. 드디어 틈이 갈라졌습니다. 밝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탄성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껍질을 깼습니다. ‘쫘악!’ 하고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파란 하늘이 아니라 폭우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둡기만 합니다. 그것도 하루 종일 말입니다. 바람이 거센 탓에 나비들은 모두 숨어 있나 봅니다. 오랜 세월, 파란 하늘과 멋진 짝을 고대했던 하루살이는 이제 어찌해야 하나요? 그렇다고 다시 껍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품었던 희망은 모두 절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수월한 위로는 비를 탓하고 비가 무서워 숨어 있는 짝들을 비겁하다고 원망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원망을 한다고 해서 행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분노와 원망 탓에 삶은 피폐해지고 말 겁니다.

 송정림 선생이 쓴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에서 흙수저인 ‘내’가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예화가 나옵니다.

 지붕에 구멍이 난 집에 세 명의 아들이 살았습니다. 종종 그 구멍을 통해 밤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은하수도 어느 날은 깜깜한 어둠만 보이기도 했습니다. 별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비가 오면 셋은 양동이를 번갈아 갖다 놓곤 했습니다. 멀리서 일하느라 집에 매일 오지 못하는 부모님이라서 지붕을 고칠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셋은 지붕에 올라가 구멍 난 곳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별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태풍으로 지붕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비바람에 무서워 떨기도 했지만 비가 그치고 날이 개자 밤하늘의 별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셋은 훗날 시인과 문학교수와 철학가로 자랐습니다. 지붕에 난 구멍이라는 처절한 가난의 경험이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텍쥐페리도 "만일 음악가의 불면증이 그로 하여금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하게 했다면, 그 불면증은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가난이 오히려 세 아들의 미래를 밝힌 축복이 되었습니다. 가난의 고통은 고통만을 선물하지 않습니다. 탁한 진흙 속에 숨어 있던 진주를 진흙 속에 들어갔을 때만 볼 수 있습니다. 고통이 주는 선물은 절망이 아니라 바로 희망입니다.

 백년을 ‘하루’라는 시간단위로 묶으면 우리네 삶도 하루살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하루가 엄청난 시련의 하루라고 해도, 그 시련은 때로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원하지 않아도 강풍은 불어옵니다. 그러나 강풍을 맞이하는 태도에 따라 강풍이 재앙의 뿌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와 반대로 희망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몰아치는 강풍 앞에서 줄이 끊긴 연이 되어 추락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바람개비가 되어 강풍이라는 시련을 비상의 계기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강풍이라는 시련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불행과 행복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강풍 앞에서 세차게 움직이는 바람개비가 독자 여러분이고 저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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