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했던 얘기는 말도 못해. 피난민이라고 구박당했던 일도."

 이옥선(80)전 연수구 농원마을 노인회장이 과거를 떠올리며 던진 말이다.

 이 전 회장은 황해도 연백 출신 실향민이다. 그의 나이 12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터지자 이 전 회장 가족은 연백에서 강화 볼음도를 거쳐 교동에 정착했다.

 "한국전쟁으로 고향 연백에서 강화로 피난을 왔어. 국민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내려왔는데, 이곳저곳 떠돌다가 강화 교동에 정착했지. 어린 나이였지만 공부가 정말 하고 싶어 그곳에서 어렵사리 학교를 다녔어. 정말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교동국민학교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했고 우등상을 타며 졸업했어. 41회 졸업생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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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연수구 농원마을 경로당에서 주민들이 마을의 옛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 강화 교동에서 인천 본토로

 이 전 회장 가족은 강화 교동에서 살다가 인천 본토로 나왔다. 그리고 ‘난민주택’이 꾸려진 지금의 연수구 농원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마을의 역사가 기록된 ‘마을 표지석’에는 1958년 재건주택 단지 조성과 함께 농원마을이 형성됐다고 적혀 있었다.

 "농원마을 일대가 원래는 포도밭이었는데, 그것을 시가 매입해 난민주택 50가구를 지어 줬어. 흙벽돌 33㎡ 집이었지. 시가 완전하게 집을 지어 준 것은 아니고 주민들이 인근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찍어서 짓고, 빨리 짓는 사람이 먼저 집에 들어가는 식이었지. 이 집에서 부모님, 나, 여동생, 남동생 이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어."


 정착할 집이 생겼지만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집은 집인데, 제대로 돼 있는 것이 없었어. 물도 없지. 불도 없지. 그래서 동네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잘 나올 때보다 안 나올 때가 더 많았어. 불을 피울 것이 없어서 뒷산에 올라가 바닥에 떨어진 나무를 박박 긁어다가 연료로 쓰기도 했고."

 피난민으로 서러움도 겪었다. "물이 없으니까 하루는 근처 논에서 빨래를 했는데, 원주민들이 왜 남의 논에서 빨래를 하느냐며 논밭에 빨랫거리를 패대기치는 거야. 또 피난민들 때문에 못살겠다는 원성도 많이 듣고. 여하튼 원주민들한테 엄청 구박을 받았어. 서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피난민들끼리 더 똘똘 뭉쳤지."

# 송도 갯벌은 생활터전

 그는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이곳에서 살았다. 송도 갯벌은 그의 생활터전이었다.

 "조개 캐러 한참 다녔었지. 힘은 들었어도 한 번 나가면 절대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어. 주로 백합이랑 동죽이 많이 잡혔는데, 이걸 잡아다가 당시 어촌계에 위탁판매를 했지. 큰돈은 아니었지만 조개를 판 돈으로 아이들 학용품을 사주고 교통비로도 주고 그랬어, 생활하는 데 보탬이 많이 됐지."

 송도 갯벌은 농원마을 주민을 비롯한 많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한때 ‘황금 갯벌’이라 불릴 정도로 조개와 꽃게가 많이 잡혔으나 계속된 매립으로 그 많던 조개는 사라졌고, 이제는 아파트와 고층 빌딩만 남아 있다.

 이 전 회장은 송도 갯벌 하면 떠오르는 딸과의 애틋한 추억이 있다고 했다. "바다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물이 한 가득 든 사발이 있는 거야. 뭔가 했더니 딸이 학교에 갔다 오다가 우물에 들러 떠온 거였어. 딸이 8살 때였는데, 엄마 고생한다며 우물에 가서 물을 받아온 거야. 바다 갔다 오면 목이 타니까 마실 물을 준비해 놨던 거지. 마을에서 우물까지 20∼30분 정도 걸렸을 텐데 기특하기도 하고 가슴이 찡하기도 했지."

 시간이 흘러 이 전 회장과 마을 주민들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20년 상환으로 집값을 다 갚았고, 개인 앞으로 등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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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선 전 농원마을경로당 회장이 농원마을의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 살기 좋은 동네로 변한 농원마을

 농원마을은 주거환경관리사업으로 점점 더 살기 좋은 동네로 변해 가고 있다.

 "그동안 일어난 변화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 이제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도 마을이 훤해. 예전에는 도로가 엉망이었고, 쓰레기도 아무 데나 버려져 있고, 하천에서 냄새도 심하게 났었지. 파리랑 모기도 많았는데, 지금은 동네가 깨끗해지고 많이 좋아졌어."

 이 전 회장은 연수구청 직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구청 직원들이 애를 많이 썼어. 일하면서 속도 썩고 고생도 많았지. 우리 마을에 정착한 50가구가 전부 피난민이라 우리끼리는 화합이 잘 되는 편이었는데, 사업을 추진하면서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야. 몇몇 사람은 말도 안 되는 것을 갖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어. 그래도 우리는 뭉치는 힘이 있었으니까 몇 사람이 그랬어도 소용없었지."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하천을 복개하니까 냄새도 안 나고 동네가 깨끗해졌어. 그런데 아쉬운 건 하천 복개 거리가 너무 짧다는 거야. 원래는 180m를 하려고 했는데 80m 정도만 했어. 나머지는 사유재산이라 동의를 안 해 줘서 못했지. 원래 계획대로 됐다면 좋았을 걸. 또 구가 나서서 도로도 매입해 줬으면 좋겠어."

 이 전 회장은 고향인 황해도 연백을 떠나 60년이 넘는 기간을 연수구 농원마을에서 보냈다. 그는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어려움도 많았지만 열심히 살았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자로 살지는 못해도 밥 먹고 사니까 만족하지. 이제는 건강만 하면 좋겠다 싶어."

 조현경 기자 cho@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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