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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식 편집국 부국장
20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매우 의미 있는 해다. 인천 시민에게도 올해는 자랑스러운 한 해가 될 것 같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소중한 흔적들이 깊이 각인된 곳이 인천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면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럼에도 3·1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만큼 인천은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소외된 곳으로 인식됐다. 시민에게는 황허장터나 창영초등학교 만세운동이 전부인 것처럼 기억될 뿐이다. 하지만 인천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어떠한 곳으로 각인돼 있는지를 알면 놀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는 4월 2일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인천이라는 도시를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바로 인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3·1만세운동 한 달 만인 4월 2일 당시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에서는 전국 13도 대표 및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정부수립 계획을 추진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국민대회 개최를 통해 ‘한성임시정부 선포’를 결정하고 4월 23일 종로구 서린동 봉춘관에서 국민회의를 개최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 소식은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인 UP통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한성임시정부 이전에 이미 연해주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돼 임시정부만 모두 3곳이 있었으나 그해 9월 하나로 통합했다. 한성임시정부는 유일하게 조선에 세워진 정부이자 국민대회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인정받으며 정통성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근간이 됐다. 그 시작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인천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어디 이뿐인가. 3·1운동 당시 인천은 다른 지역보다 조금 늦었지만 독립을 향한 열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3월 6일 지금의 인천고등학교인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고 동맹휴학을 결의하며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인천에서 3·1만세운동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를 계기로 황허장터와 부평, 주안, 문학, 소래, 영종, 월미도, 강화 등 인천 곳곳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됐고 조선인소상공인들의 상점 철시도 이어지는 등 다양한 방법의 저항운동이 나타났다. 당시 인천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으로 채워질 정도로 일본화가 됐었고, 대륙침탈을 위한 병참기지화 하면서 지역 곳곳에는 총칼로 무장한 순사와 헌병이 삼엄한 경비를 선 상태였다. 목숨을 걸 정도의 절박한 용기가 없으면 만세운동을 펼칠 수 없는 곳이라는 점에서 인천에서의 3·1만세운동은 달리 평가되고 있다.

 다수의 사상자와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는 엄혹한 현실에서도 인천의 만세운동은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또 하나의 자랑은 독립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선생의 흔적이 인천 곳곳에 지울 수 없는 역사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인천감리서에서 두 차례 옥고와 한 차례 탈옥을 거치면서 열혈 청년 김창수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로 거듭난다. 백범은 그의 저서 백범일지(白凡逸志)를 통해 인천에서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했다. 탈옥과정에서 마주친 답동성당, 내리교회, 북성고지, 용동마루턱 등의 풍경과 두 번째 옥고를 치르며 노역에 동원됐던 인천항 제1부두 축항 공사장, 그리고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옥바라지를 했던 객주골목 등이 그것이다. 백범은 1946년 임시정부에서 귀국한 후 38선 이남지방을 순회하며 가장 먼저 인천을 찾기도 했다. 이처럼 인천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에서 결코 잊히지 않는 자랑스러운 기록을 갖고 있으나 이러한 역사를 제대로 알리거나 활용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다행스럽게도 인천시와 중구가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인천이 갖는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고 한다. 단순한 행사나 조형물 몇 개 만들어 내는 형식적 흉내 내기가 아니라 이참에 인천을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중심도시’로 세우는 대역사에 나서면 어떨까 생각한다. 인천에서의 독립운동 기록은 더 많을 것이다. 이를 위해 시가 나서야 한다. 그리고 발굴한 기록과 흔적들은 학술적인 뒷받침뿐 아니라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재현하고 기록하는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면 좋겠다. 일제의 폭압을 뚫고 독립을 열망하며 목숨을 버렸던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기억이 3월에만 머물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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