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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승 21C안보전략연구원 원장
최근 북한과 접경지대를 상징하는 우리나라의 DMZ(Demilitarized Zone), 일명 ‘비무장지대’가 내외의 관심을 촉발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인 1957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휴전선)으로부터 남북 각각 2㎞에 걸쳐 이뤄진 이 지대는 세계에서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힘든 지대로,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2차례의 북미정상회담으로 인해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간의 분단 상태가 지속됨에 따라 이 지대에는 군대 주둔이나 무기배치, 군사시설 설치가 금지된 가운데 민간인의 출입마저 엄격하게 통제됐기 때문에 환경오염이나 파괴가 이뤄지지 않아 1급수 어류뿐만 아니라 멸종위기에 처해있는 동식물도 다수 서식하고 있어 한반도 초유의 생태 보전지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어 그동안 이 지역을 남북의 ‘평화시’ 및 ‘평화누리길’로 조성, 개발하자는 의견이 대두됐다.

 바로 이런 시점에 내가 운영하고 있는 ‘21세기안보전략연구원’에서는 한동안 ‘분단국가’의 전형(典型)이었던 베트남에서의 학술회의를 위해 DMZ문화원(원장 : 장승재 신한대 교수)과 함께 과거 우리의 청룡, 맹호, 비둘기, 십자성부대 등의 군인들이 파병됐던 ‘다낭’으로 출발했다.

 이번 회의에는 DMZ 관련 연구로 널리 알려진 전문가들인 김창환 교수(강원대), 박병직 교수(한국관광공사)를 비롯해 우리 연구원의 이근창, 김복영, 최영철 이사 등 총 21명이 동행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왜 하필이면 지금 "왜 베트남에서 학술회의를 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베트남은 우리의 많은 군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곳이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프랑스로부터 식민통치를 당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국가이자 북한 역시 남-북 베트남전쟁 과정에 적지 않은 병력을 파병했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 베트남에는 155마일에 이르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한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DMZ는 이미 ‘과거의 상징물’로 남아 있는, 적어도 우리로서는 무언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베트남은 1954년 미국과 중국, 소련의 ‘제네바협상’에 의해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하여 남· 북으로 분단됐고, 이후 1975년 북베트남이 사이공(현재의 호찌민)을 함락시킨 후 공산화 통일을 이룩하기까지 동-서독과 함께 분단국가의 전형적인 모델로 간주됐었다.

 미국과의 피비린내나는 전투 과정에서 베트남에서는 수백만 명이 사상(死傷) 당했고, 전 국토와 건물이 폭격을 당해 초토화됐지만, 통일을 이룬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 중부의 ‘동하’ 지역에는 아직도 DMZ의 상흔(傷痕)이 관광물(?)로 변해 남아 있었다.

 이 베트남의 DMZ는 북위 17도선보다 약간 남쪽에 위치한 벤하이강을 따라 설정됐는데, 남쪽의 ‘후에’에서 북쪽으로 90㎞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분계선 양쪽으로 5㎞ 이내 지역이 비무장지대였다.

 현재는 ‘히엔르엉’교(橋)(Cau Hien Luong : 일명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과거 프랑스군이 물자 보급을 위해 벤하이강 위에 세운 다리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분단을 상징하는 다리로 알려졌음)가 벤하이강을 가로지르는데, 다리 중앙에 흰색의 경계선이 있으며, 파란색이 북베트남 쪽이고 노란색이 남베트남 쪽으로 ‘동하’에서 시작돼 1번과 9번 국도(國道)상에 놓여 있다.

 분단 당시 남북의 베트남인들은 오직 이 다리를 통해서만 왕래할 수 있었는데, 강폭이나 다리의 규모로 볼 때 우리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보였다. 우서 강폭이 200∼300m밖에 되지 않았으며, 다리 역시 3∼4m 정도로 협소해 대량의 물자 수송로로서는 적합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베트남의 분단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였던 미국, 소련 등 관계자들을 밀랍으로 만들어 모형화해 놓은 건물과 함께, 남북 베트남의 선문공작 역할을 했던 확성기, ‘남북은 하나임’을 상징하는 건축물, 분단과정 및 통일과정과 관련된 물품과 사진 등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 등이 산재(散在)해 있었다.

 이렇듯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평일이어서인지, 아니면 통일을 달성한 지 매우 오래 됐기 때문인지 우리 일행을 포함한 한국 관광객들만이 북적댈 뿐 정작 베트남인들은 안내원이나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 것’이라는 말처럼 분단 당시 생존했던 많은 베트남인들은 이미 유명(幽明)을 달리했고, 이제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중시하는 베트남의 청년들에게는 분단의 쓰라린 상처에 매달리기보다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상념(想念)을 떠올리면서 3박 5일간의 짧은 일정을 아쉽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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