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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평생을 정치인으로 살았던 벗이 있습니다. 그가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살던 어느 날, 모처럼 둘이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평소와 달리 그는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무슨 근심이 있나 싶기도 하고, 또 잠시도 쉴 틈도 없을 정치인의 삶에서 벗어나 모처럼 한가로운 일상을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장터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내 주위엔 사람들이 들끓었어. 마치 밀물처럼 말이야. 그런데 그 자리에서 물러나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모조리 빠져나가는 게 보여."

 이렇게 말하는 친구의 표정에는 허무감으로 가득했고, 그의 눈은 축축해져 있었습니다. 어떤 말로도 그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들었습니다.

 「뒤주 속의 성자들」이라는 책에 노생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나라 사람인 노생은 출세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드날리며 살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하고 방에 들어가니 여옹이라는 노인이 그 방에서 먼저 쉬고 있었습니다. 편안한 모습의 노인이라 노생은 자신의 신세를 털어놓았습니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면치 못해 도저히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베고 누운 베개 한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생기더니 그것이 점점 커졌습니다. 나중에는 사람이 족히 들어갈 만큼 넓어졌습니다. 그가 그 구멍으로 들어가자 큰 집이 한 채 보였습니다. 그 집에 머물게 된 노생은 집주인에게 잘 보여서 주인 딸과 혼인하고 과거에도 합격해 관리가 됐습니다. 그러나 빠른 출세를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역모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겨우 사형만은 면한 그는 멀리 외진 곳으로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노생은 농사를 짓고 살던 지난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때는 약간의 땅이라도 있어서 열심히 노력만 하면 먹고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는데, 괜스레 출세에 욕심을 내어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며 탄식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다행히도 노생의 누명이 벗겨졌고, 황제는 그를 다시 복직시켰습니다. 그 후 그의 자식들 모두는 좋은 집안의 자녀들과 혼인을 했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려나갔습니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노생의 몸도 늙고 허약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도 세상 어떤 권세로도 막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깬 노생은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 앉았습니다. 옆에서 노생을 바라보던 여옹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인생이란 모두 그처럼 한바탕의 꿈과 같은 것이라네."

 노생은 그제야 꿈속의 모든 일들이 자신의 부질없는 헛된 욕망을 잠재우고 깨우쳐주기 위한 여옹의 배려였음을 알게 됐습니다.

 밀물과 썰물! 내가 바다를 향해 오라고 해서 밀물이 되고, 가라고 해서 썰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바다는 때가 돼서 들어오고 때가 돼서 나갈 뿐입니다. 내가 권력을 갖고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내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 권력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권력에서 물러나자 사람들이 떠나는 것 역시 같습니다. 그들은 ‘내’가 아니라 ‘권력’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바다 스스로가 필요해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제 친구가 어서 허망함에서 벗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 친구와 함께 가까운 산으로 새벽 산행을 갔습니다. 놀랐습니다. 한때는 공황증세까지 겪었던 그 친구가 그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전의 여유를 찾았던 겁니다. 밀물과 썰물처럼 삶도 그런 것이라고 말하면서 껄껄껄 웃는 그의 손을 저는 말 없이 힘껏 쥐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제 벗이란 사실이 참으로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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