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화성시 제암리 및 고주리가 재조명받고 있다.

 당시 화성에서는 격렬했던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제암리와 고주리 주민 29명이 참혹하게 살해됐다.

 현재 제암교회가 있던 터에는 순국기념탑과 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살해됐던 주민들을 추모하고 독립운동에 대해 설명하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어 당시 치열했던 흔적이 방문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 화성시 제암리 향남읍에 있는 제암리·고주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박종현 기자 qwg@kihoilbo.co.kr
# 직접 가 본 제암리

 31일 찾은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위치해 있는 3·1만세로 일대. 이 길을 따라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걷다 보면 마치 손님을 안내하듯 태극기와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깃발 20여 개가 세워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100년 전 있었던 화성지역의 격렬한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학살이 있던 장소다. 이곳은 현재 억울하게 살해된 29명의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조성돼 있다.

 지금은 사라진 제암교회의 옛 예배당 터에는 공원과 3·1운동순국기념탑이 설치돼 있다. 이곳을 찾은 학생, 군인들이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100년 전을 회상하며 고개 숙여 선조들에게 묵념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었다.

 주변에는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고발한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의 동상이 있고, 동상 주변에는 그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수원역에서 제암리까지 타고 왔던 교통수단인 자전거가 보였다.

 제암교회 옛터에는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고, 그곳에서 50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당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순국기념관이 마련돼 있었다.

▲ 가족을 잃은 제암리 모녀. <화성시 제공>
 순국기념관 전시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화성지역의 3·1운동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만세운동으로 인해 체포된 시위 주도자들의 판결문도 볼 수 있다. 주민들의 증언도 있었는데, 제암리 학살사건 생존자인 노경태 씨는 "교회당 바닥에 앉아 있던 주민들은 뛰어오르고 쓰러지고 하는 아수라장을 이뤘다"고 증언해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견학을 온 아이들은 고사리손으로 메모장 앞에 놓인 펜을 집어 오밀조밀 ‘고맙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등의 마음을 담은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화성시는 2016년부터 일제의 만행이 이뤄졌던 옛 제암교회 터에 독립운동 역사문화공원을 조성 중이다. 2021년 말 완공된다. 이곳에는 제암리·고주리 주민 29명을 추모하고 일제강점기 당시 화성지역의 모습과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일제가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을 일으킨 이유,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설명하는 자료를 전시할 계획이다.

# 격렬했던 화성의 만세운동

 화성은 애초 일제의 간척사업으로 인해 신문물의 독점 폭리, 한국인에 대한 재산 강탈로 인해 반일 감정이 높았다.

 3·1운동 당시 전국의 면사무소 19개소, 경찰관주재소 16개소가 파괴됐는데, 이 중 화성지역에서는 면사무소 2개소, 경찰관주재소 1개소를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 2명을 처단하는 등 격렬하게 진행됐다는 점에서 이를 파악할 수 있다.

▲ 일제의 학살로 파괴된 민가 모습. <화성시 제공>
 화성지역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지역 사강장터 만세시위, 31일 향남지역 발안장터 만세시위, 4월 3일 장안·우정지역 만세시위 등 3개 지역별 만세시위로 전개됐다.

 같은 달 31일에는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1천여 명이 발안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3명이 사망하자 흥분한 군중이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가옥에 돌을 던져 이곳에 살던 일본인 43명이 삼계리 지역으로 피신했다.

 사망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점차 격해졌고, 4월 3일에는 오전부터 수촌리와 석포리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안면사무소로 몰려가 건물에 불을 붙인다.

 일본군 검거반은 수촌리를 독립운동의 진원지로 파악, 시위를 주도했던 천도교 순회전도사 백낙열 선생과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 선생 등을 체포하기 위해 이튿날인 5일 새벽 수촌리를 급습한다. 이 과정에서 마을 전체 민가 42가구 중 40가구가 불에 타기도 했다.

 일제는 같은 달 11일 수촌리를 비롯한 장안면·우정면 내 25개 마을을 포위하고 204명의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했으며, 제암리 학살사건 전날인 14일에는 시위대 175명을 검거하고 민가 211가구를 불태우는 등 철저한 검거와 보복을 진행했다.

# 제암리·고주리 학살의 시작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은 격하게 전개된 화성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 응징이다. 척후병을 미리 보내 제암리 주민들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순사보를 통해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소집한 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들을 파악해 살해한 점 등에서 알 수 있다.

 일본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중위가 특별검거반으로서 발안지역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당초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시위대 토벌이 끝난 발안지역의 치안 유지였다. 그러나 발안지역의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을 붙잡지 못하자 학살을 계획한 아리타는 같은 달 15일 부하 11명과 함께 순사보 조희창, 일본인 사사카 등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에 들어선다.

 마을에 도착한 검거반은 특별히 전할 말이 있다며 마을의 15세 이상 남자를 제암리 교회로 모은 뒤 교회 출입문과 창문에 못질을 해 도망치지 못하게 한다.

 곧바로 아리타의 사격 지시가 떨어졌다. 21명의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이를 지켜보던 여성 주민 2명도 참혹하게 살해했다. 교회에는 증거인멸을 위한 방화가 이뤄졌다.

 만행이 이뤄진 뒤에는 10분 거리의 고주리로 가 천도교인 김흥렬의 일가족 남성 6명을 칼로 차례차례 베었다. 여기서도 검거반은 시신을 난도질한 뒤 불살라 버렸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수원역에서 제암리까지 일제의 눈을 피해 자전거를 타고 참상을 사진으로 찍지 않았다면, 또 그가 제암리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묻혔을 반인륜적 사건이었다.

▲ 화성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을 세상에 알린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동상.
 아리타는 이 일로 인해 군사재판에 회부됐음에도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학살에 대한 처벌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일본 정부는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일어났던 학살사건에 대해 사죄하지 않고 있다.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을 연구한 화성시 이혜영 학예사는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은 화성지역 3·1운동과 그 과정에서 제암리·고주리 주민들이 보여 줬던 적극적인 항거에 대한 계획적인 보복이자 항일운동 주도세력에 대한 박멸을 목표로 한 학살행위였다"며 "화성지역민들이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쟁취하고자 목청껏 외쳤던 만세의 함성은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세상을 염원한 독립항쟁으로 새롭게 재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현 기자 qw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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