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2014년 우리나라 11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석굴암, 불국사, 창덕궁, 수원화성, 하회·역사마을 등에 이어 남한산성이 등재된 것은 남한산성이 가진 역사적이면서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자 처음으로 경기도 주도로 등재가 추진돼 성사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전 세계가 인정했지만 아직은 낯선 남한산성의 가치를 되돌아본다. <편집자 주>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터를 활용해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해발고도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이다. 둘레가 12㎞에 이르며 산 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다.

 또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뤄진 결과이다. 이 기간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뤄졌고, 이러한 무기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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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성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바탕으로 한 등재기준 등을 충족해야 하며, 이와 더불어 완전성, 진정성, 보존관리를 중점적으로 평가하게 된다. 남한산성은 OUV 기준에 부합하는 문화유산이다.

 남한산성은 총 12.4㎞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돼 있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 이것은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기록상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해 조금씩 증축돼 지금의 모습이 됐다는 증거이다.

 또한 병자호란 등의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 축성기술의 모습들을 발달 단계별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췄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이 있을 때 임금은 한양 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있는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해 조선의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했다.

# 진정성(Authenticity)

 남한산성은 자연지세, 건축구조, 도시계획적 측면에서 모두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성곽과 산성도시는 진정성의 측면에서 볼 때 충분한 역사적 사료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진정성을 충족하기 위한 속성인 형태와 디자인, 자재와 구성물질, 용도와 기능, 전통 기술 관리체계, 입지와 주변 환경, 비물질적 전통, 정신과 감성 등의 측면에서 남한산성에는 다양한 기록유산과 연구물이 존재한다.

 형태와 디자인에서 보면 남한산성은 동서로 긴 타원형의 포곡식 산성으로서 둘레가 12㎞가 넘는 토대형 산성이다. 곡면을 이용해 사격의 사각지대를 없앴고, 지세에 따라 남쪽 성곽이 북쪽보다 더 높은 특성이 있다. 주변에서 성곽보다 높은 곳에는 방어를 위해 외성을 설치했다.

 자재와 구성물질에서 남한산성은 일부 화강암과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편마암을 이용해 축성했고, 여장 전돌은 주변의 재료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 기술 관리체계에서 보면 시대별로 축성술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인조, 숙종, 영조·정조대 축성 기법이 다르며 관리를 위해 수어사, 승영사찰제, 3영2부제 등이 운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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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전경.
 입지와 주변 환경을 보면 도성에서 25㎞ 떨어진 가까운 거리로 대피가 쉬우며 다수의 인구 수용이 가능했다. 또한 한강과 경안천을 자연 해자로 이용하고 한강 수운과 연결됐으며, 동래로와 봉화로가 교차하는 편리한 교통의 요지였다.

 비물질적 전통에서 보면 이러한 교통의 편의성은 전염병 창궐을 유발해 횃대놀이, 장승제 등의 민속놀이를 발달시켰으며, 청량당 도당굿과 같은 전통 신앙의 중심지, 병자호란 이후 유교 통치 이념의 상징 공간이자 북벌론의 중심, 그리고 광주 읍치로서 천주교 순교지로 이어졌다.

 주민들의 생활에서는 소나무 군락 조성, 효종갱과 산성소주와 같이 읍치로서의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민속들이 오늘까지 남아 있다.

 정신과 감성 요인들과 관련해 남한산성은 외세에 대한 저항과 자주의식의 구심점으로서 구한말에는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한 의병 거점이, 이승만 정권에서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국방의 성소로서 오늘날까지 주변에 군사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 완전성(Integrity)

 완전성의 측면에서 보면 남한산성의 경관요소를 군사·통치·민속 요소로 구분했을 때 각각의 경관요소들은 남한산성의 전체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데 적절하게 구성돼 있다.

 군사적 경관요소들을 보면 1925년 대홍수에 의해 유실된 동문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벽과 장대, 대문, 승영사찰터 등이 온전히 남아 있으며, 가능한 지속적인 보수와 개축이 이뤄져 왔다. 통치 경관요소로서 좌전, 우실, 행궁, 좌승당, 인화관터 등의 읍치 시설도 재건되거나 복원·수리가, 민속 경관요소에 해당하는 제례, 불교의식, 전통음식과 가양주, 비석, 누정, 자연환경 등은 주민들이 대대로 전승해 오고 있고 전체적으로 보호책을 마련하고 있다.

정진욱 기자 panic82@kihoilbo.co.kr

 <자료=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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