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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천상병 시인은 삶을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귀천’이라는 그분의 시를 떠올려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이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아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인생 전체를 꿰뚫어보는 시인의 깊은 통찰에 새삼 고개가 숙여집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기도 하고, 누구나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기도 하며, 실패의 쓰라림도 맛보곤 합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런 삶일지라도 삶은 분명 가슴 벅찬 소풍이라고 규정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기뻤을 때보다도 힘들었을 때가 차라리 더 아름다웠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이 가득 차 있는 지금보다도 오히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차라리 더 좋았다고들 말합니다. 부족할 때는 혼자 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식구들을 위해 욕구를 억눌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풍족할 때는 먹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먹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부족했던 시절, 누군가를 위해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의 욕망을 절제했다는 사실을 어른이 돼서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워합니다, 그때 그 시절을.

 이제야 알 듯싶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절제했기 때문에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가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유하더라도 절제할 수만 있다면 그리움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절제는 곧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서는 이곳에서의 삶이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 소풍이 가슴이 벅차오르는 환희로 가득 차게 하려면 욕망을 절제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가슴 벅찬 ‘나’의 사랑이 ‘너’에게도 촉촉한 감동으로 전해질 테니까요.

 그러나 절제 없는 사랑은 ‘나와 너’ 모두를 파멸의 길로 밀어 넣어 버립니다. 「물속의 물고기도 목이 마르다」라는 책에서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예화를 읽었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 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연호아빠, 생선 맛있는데 왜 안 드세요?’, ‘입맛이 변했나 봐.’ 아내와 얘기하는 옆에서 두 아들 녀석이 맛있다며 생선을 먹는다. 이제 제법 거짓말이 느는 것을 보면, 나도 아버지가 되어 가나 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 저의 부모님 생각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아마 그들도 연호 아빠와 같은 마음으로 저를 키우셨을 겁니다. 자신의 식욕을 절제하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서 제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셨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모님의 절제된 사랑을 먹고 온전히 클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세상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었나 봅니다. 테레사 수녀에게 어느 신도가 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녀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르고 있는데 수녀님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실 수가 있지요?" "저는 단지 한 번에 한 사람씩만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냥 한 번에 한 사람씩만." 맞습니다. 지금 이 사람을 ‘그냥’ 사랑할 뿐입니다. 내 목적을 달성하려 하거나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할 뿐입니다. 그때 천상병 시인의 깨달음처럼 우리도 하늘나라에 가서 행복하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저곳에서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운 소풍이었습니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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