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우리 선조들이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들불처럼 일어난 ‘혁명적 사건’이다.

 잃어버린 조국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활발히 이뤄졌다. 경기도 출신의 항일운동가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이들은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항일전선을 이끌었고, 이후에는 국내 정치의 최일선에서 자신의 항일 경험에 기초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 일제강점기 팔달문과 그 앞의 거리.
# 3·1운동의 도화선 ‘몽양 여운형’

 몽양 여운형 선생은 양평군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벼슬을 누리던 부잣집 양반댁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 사랑채에 학교를 세워 신교육운동에 벌이기도 했다.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알려진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와 이동녕·이회영 등 명사들과 교류도 가졌다. 1911년에는 기독교 목회자가 되려고 평양의 장로교연합신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민족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했다. 특히 조선과 일본,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여운형 선생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우국지사들과 유학생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 청원을 위해 김규식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조선인들이 독립을 원하고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궐기운동을 조직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2월 1일 만주 지린에서 대한독립선언,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3월 1일 경성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이후 1년여에 걸쳐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왼쪽부터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 선생.
 1919년 11월에는 일본 도쿄를 방문해 일본 고위 관료를 상대로 조선 독립의 타당성을 알리면서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상하이에서 한인 교민사업에도 관여했으며, 한인 자녀들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에도 힘을 보탰다.

 상하이에서 3·1운동을 도모할 당시 중국의 지도자 쑨원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을 만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뒤에는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소련의 지도자 레닌, 트로츠키 등도 교류했다. 일제에 맞서기 위해 중국의 장제스,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찌민 등 당대 혁명가들에게도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알렸다.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여운형 선생은 1942년부터 해방 뒤의 식량과 치안 문제를 준비했다. 1944년 건국동맹 등 비밀조직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수많은 맹원들을 확보했으며, 해외 독립운동 조직들과도 연계해 공동 투쟁을 도모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에 해방이 찾아오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전국적으로 145개 지부를 조직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이 알려지면서 분단의 위험이 초래되자 좌우 합작과 남북 연합을 통해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던 중 1947년 암살을 당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 삼균주의 창시자 ‘조소앙’

▲ 일제강점기 수원에 세워진 건물.
 조소앙은 1887년 4월 10일 파주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정규와 모친 박필양의 6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2년 7월 만 15세의 나이로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해 사서삼경 등의 유교경전, 만국역사, 각국의 지리, 작문, 산술 등을 익혔다. 성균관에 재학 중이던 1903년 이하영 등 친일 정부 관료들이 산림 등의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넘기려 하자 신채호·유인식 등과 함께 성토문을 작성해 항의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성균관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시절 조소앙 선생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탄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 박은식·신채호 등과 활동하면서 박달학원 교사로 재직하며 상하이 거주 한인 청년들을 가르쳤다. 1914년 ‘육성일체와 각계각층의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육성교를 구상했으며, 이를 체계화해 ‘일신교령’을 집필하고 이듬해에 발표했다.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항일운동가 14명의 명의로 독립운동의 통합기관인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했다. 이듬해 2월에는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해 저명한 민족독립운동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을 지원하기 위해 파리로 건너가기도 했다.

 특히 유럽에서 외교 역량 강화와 독립 승인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8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해 한국 독립 승인안을 제출, 승인받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회 만국사회당 집행위원회에도 참석해 한국 독립 문제 실행 요구안을 제출·통과시켰다. 1921년 12월 중국 상하이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영국·덴마크·러시아 등지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국 열강들의 지지와 지원 등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 중반 침체된 임시정부의 활로를 모색하려고 중국 관내 지역에서 이뤄진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좌익진영이 일방적인 해체로 결렬되자 임시정부 중심의 인사들로 구성된 한국독립당 창당을 1930년 1월 주도했다. 조소앙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당의와 당강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으로 선임돼 ‘삼균주의’에 기초한 독립운동 이념을 제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기반으로 개인·민족·국가의 평등을 강조한 사상이다.

 1945년 8월 광복 후에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신탁통치 반대에 나서는 한편, 삼균주의가 실현되는 국가 건설 작업을 추진했다. 1950년 6월에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성북구에서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한국전쟁 당시 강제 납북돼 1958년 9월 평양에서 서거했다.

▲ 수원역 앞 거리.
# 잊지 말아야 할 도내 항일운동가들

 1894년 광주시에서 태어난 신익희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 유학을 마치고 서울 중동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 관제, 임시 헌장을 의결·선포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그는 임시정부 법무·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역임하는 등 활발히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광복 이후에는 조국으로 돌아와 1948년 제헌국회 부의장을 맡는 등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1867년 수원군 구포리에서 태어난 김교헌 선생은 독립협회 간부진들이 개혁 내각 수립과 의회 개설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자 독립협회의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중 계몽 선봉에 섰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고, 1916년 나철에 이어 대종교 2대 교주로 취임했다.

▲ 왼쪽부터 여운형, 조소앙, 신익희 선생.
 또 조선총독부가 대종교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하자 대종교 본사를 만주로 옮기고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46개 시교당을 각 지역에 설치,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매진하다 1923년 만주에 있던 대종교 본사 수도실에서 순국했다.

 1872년 광주에서 태어난 김창환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의 최일선에 섰다. 1899년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해 복무하던 도중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해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 1910년 신민회가 만주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결의하자 이회영·이시영·이동녕 선생 등과 함께 만주에서 청년교육을 위한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켰다.

 1932년 한국독립군 총사령 대리로서 한중 연합군을 편성해 같은 해 8월 만주 쌍성보에서 일제와 격전을 벌여 큰 전공을 세웠다. 이후 한국민족혁명당, 조선혁명당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벌이다 1937년 안타깝게 순국했다.

  박종대 기자 pjd@kihoilbo.co.kr

사진=독립기념관·수원시 박물관사업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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