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미간 대화 재개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남측을 향해 중재자가 아닌 당사자가 될 것을 요구하며 대미의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정부의 중재역할에 '빨간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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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최고인민회의서 시정연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13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전날 열린 최고인민회의 2일 차 회의에 참석해서 한 시정연설에서 "(남측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남측이) 외세의존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북남관계개선에 복종시켜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또한 "진실로 북남관계 개선과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갈 의향이라면 우리의 입장과 의지에 공감하고 보조를 맞추어야 하며 말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행동으로 그 진심을 보여주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는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중재자, 혹은 비핵화 협상의 촉진자 역할을 다짐해 온 문재인 정부에 대해 '외세'인 미국이 아닌 '같은 민족'은 북한과 한 편이 돼 달라는 요구로 읽힌다.

북한이 '외세 배격'과 '민족 공조'를 강조한 것은 새롭지 않지만, 김 위원장이 노골적인 표현을 동원해 직접 이를 주문한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그간 동맹국인 한국이 '중재자'임을 자처하는 것 자체가 북한의 입장을 더 고려하겠다는 속내가 아니냐며 우리측에 서운함을 토로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빅딜'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달라는 게 미국이 바라는 한국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외교 소식통들은 전했다.

북한과 미국이 모두 한국이 '중재자'가 아닌 '같은 편'에 서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한국 정부가 양측의 기대를 충족하면서 중재 역할을 하기는 쉽지 않은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적인 중재 행보에 나서려는 시점에 나왔다.

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조만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또는 남북접촉을 통해 한국이 파악하는 북한의 입장을 가능한 한 조속히 알려달라"라고 요청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조만간 특사 파견 등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김 위원장이 남측의 '중재 역할'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면서 남북정상회담도 조기성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김 위원장은 4·27 판문점 선언 1주년을 앞두고 남북 간 합의사항이 대북제재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했다.

"미국은 남조선 당국에 '속도 조절'을 노골적으로 강박하고 있으며 북남합의 이행을 저들의 대조선제재압박정책에 복종시키려고 각방으로 책동하고 있다"면서 이로 말미암아 관계개선이냐 파국이냐의 엄정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판문점 선언 1주년이 남북정상회담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는 상황이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의미다.

일각에선 김 위원장 입장에선 비핵화와 관련한 문 대통령과의 합의사항이 북미 간 결실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남북은 지난해 9월 평양정상회담 합의문에 '북측은 미국이 6·12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는 문구가 담겼다.

김 위원장은 지난 2월 2차 북미정상회담 '영변 핵시설 폐기'를 카드로 내밀었지만 원하는 제재완화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북한 입장에서는 남북정상회담에서 거론된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가 북미정상회담에서 관철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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