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산성을 알리는 데 상당히 공헌한 작품이자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지정 이후 또 한 번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낸 좋은 영화다.

 역사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삶과 죽음의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날들의 기록이다.

 1636년 음력 12월, 청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온 게 병자호란이었다. 남한산성은 47일간 성 안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척화파와 주화파의 격렬한 논쟁과 다툼 그리고 꺼져 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이 무섭도록 끈질김을 보여준다.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이고, 씻을 수 없는 역사였다. 김훈 특유의 냉혹한 행간 뒤에 숨겨진 뜨거운 말의 화살들은 독자를 논쟁의 한가운데로 내몬다.

 역사소설이란 전환에 필요한 작가의 상상력이나 의도를 조절하는, 주제는 역사적 사실을 변형·수정·가감하는 기준이 된다고는 하지만 대중은 그것을 실재의 역사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역사를 혼동해서는 안 되기에 영화 ‘남한산성’의 허와 실을 찾아 팩트를 체크해 보자.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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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성곽모습. <아이클릭아트 자료사진>
병자호란 발발 이후 조선의 조정은 청의 진격 앞에 전술, 정보, 역량도 없이 좌고우면했다. 그 사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 앞에 신하들의 논쟁은 격렬하기만 했다. 대표적 인물이 척화파의 김상헌과 주화파의 최명길이다. 이 둘의 논쟁과 영화의 장면은 역사소설에서 있음직한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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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논쟁을 좀 지루하게 끌고 가고 있는 느낌이다.

 역사소설이란 작가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을 좇기 때문에 기존 역사적 사실이 변형되기도 하는 사실과 픽션의 만남이다. "역사소설은 사실과 허구의 구분 너머에 있는 글쓰기다"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실제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특정의 실존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재현 또는 재창조하는 것이 역사소설이다.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영화 ‘남한산성’의 명장면과 명대사를 살펴보자.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 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는 내심을 숨긴 채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영화의 재미를 한층 북돋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고,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다"는 말은 명장면, 명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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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스틸이미지
# 대장장이 서날쇠는 실존 인물인가.

 아니다. 가상 인물이다. 그러나 100% 가상 인물은 아니며, 모티프가 된 인물이 있다. 실록에 서흔남이란 인물이 있고, 서흔남이 격서를 전달하러 남한산성을 나갔다는 짧은 기록이 있다.

 실록에 따르면 서흔남은 사노비 출신이고, 나민갑의 병자록에 따르면 일정한 직업이 없이 무당 일을 하며 대장간 일을 겸하는 사람으로 묘사돼 있다.

 병자록에는 서흔남이 거지 행색으로 청군 진영을 기어다니며 구걸하는 척하면서 첩보활동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자의 기록을 취합해 ‘서날쇠’란 캐릭터는 영화의 재미를 북돋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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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스틸이미지
# 도원수는 격서를 보낸 서날쇠를 왜 죽이려 했는가.

 사실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서날쇠가 도원수 김자점에게 격서를 보내는 데 성공하고, 도원수는 원래 경기도 양평에 주둔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격서를 받은 후 답서를 써서 서날쇠(서흔남) 편으로 보냈다.

 인조는 서흔남 편으로 도원수의 답변을 받아 읽었다. 서날쇠가 암살당할 뻔한 것은 픽션이다. 실제로 서흔남은 나중에 행정대부 품계상을 받았다. 서흔남 자손들도 우대받았으며, 후세대의 실록에도 서흔남의 공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서흔남의 묘비석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지수당 옆에 설치·보존되고 있다.

# 병사들에게 지급한 가마니를 빼앗아 말먹이로 주었는가.

 사실이 아니다. 가마니란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왔다. 그 이전에는 ‘섬’이라 표현했고, 원본에는 ‘섬’이라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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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스틸이미지
 김상헌이 병사들에게 추위를 막게끔 가마니를 지급했지만 당시에는 ‘방한복’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가마니로 추위를 견디는 것은 서날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해 왔던 관습이다.

 실록을 보면 "추운 날에 병사들에게 섬(가마니)을 지급하라"는 지시가 종종 나온다. 남한산성 안에서 가마니를 지급했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으나, 지급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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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스틸이미지
 이 가마니를 빼앗아 말먹이로 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대신 실록에 "말들이 굶어죽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식용으로 주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일부 기록들을 가지고 고위층과 실제 병사(평민)들 간의 갈등을 묘사하기 위해 픽션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양반층과 군졸들이 고통을 분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화 ‘남한산성’의 허와 실<2>에서 계속)

<도움말=전보삼 만해기념관장(철학박사·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명예회장)>

정진욱 기자 panic82@kihoilbo.co.kr

※본 내용은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이 ‘광주문화’에 수록한 글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일반 학계의 주장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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