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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범 아나운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 그리운 얼굴들과 재회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벗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교 시절 ‘중창단’으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입니다. 단원은 반주자 포함 모두 13명으로 미국에 사는 친구들과 목회를 하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였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벗들도 있었습니다. 반갑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우리 학교는 당시 새로 만들어진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선배들도 없이 만들어진 중창단이었습니다. 점심시간, 식사를 10분 안에 후다닥 마치고 남은 시간에 날마다 음악실에 모여 열심히 연습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시절 인천에는 각 고등학교들마다 중창단이 있었습니다. 인천고 필리아, 제물포고 웃터골, 인천여고 에로스, 신명여고 목련, 동인천고 파이어스, 송도고 에코, 박문여고 코이노니아, 부평고 아모스 여디디아, 인성여고 엘레네, 선인고 브니엘, 인하부고 한빛, 광성고 아가페, 인일여고 등등 제 기억으로는 모든 고등학교에 중창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천을 합창의 도시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각 학교 중창단원들은 수백 명 중에 뽑힌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각 학교마다 은근히 경쟁심도 존재했었습니다. 우리 학교 중창단도 몇몇 대형교회들이 주최하는 고교 중창제에 출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축제와 행사에 찬조 출연하는 등 많은 추억을 남겼습니다. 물론 정기연주회도 개최했고요. 중창단 덕에 참으로 즐겁게 보낸 학창시절이었습니다.

 고교 추첨제 때문에 정말로 원하지 않았던 학교에 배정받은 저는, 처음에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중창단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중창단’ 활동이 제 인생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은 매우 큽니다.

 소극적이던 성격이, 수없이 많은 무대를 경험하면서 적극적으로 변모하게 됐고, 여러 사람이 만드는 ‘화음’에 매료돼 정말 많은 중창, 합창 연주회를 관람했습니다.

 그것이 밑바탕이 되어 대학 시절 합창단 지휘 등을 거치면서, ‘무대’에 서는 일이 제게는 참으로 행복한 일이며 적성에 잘 맞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로에 대한 고민 후에 방송사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심하고 몇 차례 입사 도전 끝에 마침내 합격, 지금까지 지상파 방송 아나운서로 활동을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방송 프로그램 진행뿐 아니라 크고 작은 행사 사회, 자녀교육 특강, 소통 강연 등 무대에 서는 일이 너무나 즐거운 일임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니까 고교시절 중창단 활동이 결국에는 제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랜만에 만난 중창단 친구들이 얼마나 반가웠을지 상상이 되실 것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긴 세월 보지 못했지만, 다들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대기업 재무팀장, 입시학원 스타강사, 외국계 기업의 아시아 지역 총책임자, 출판사 디자인 실장, 특수학교 교사, 잘나가는 생활협동조합 이사, 소상공인, 목회자, 그리고 미국에서 IT기업에 근무하는 친구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일을 하며 소중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들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고교 졸업 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가 만난 시간만큼은 다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로 돌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학창시절 재미난 일화 등 각자의 추억 보따리에 혹은 공통의 보따리에 들어가 있던 이야기들이 꽃망울 터지듯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처럼 ‘아나운서 원기범’이 아닌 자연인으로 아무 허물없이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자리를 파할 무렵 한 친구가 ‘거역할 수 없는 인연’이라는 말로 우리의 우정을 표현하더군요. 맞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 훗날 18세의 감성으로 다시 한 번 정기연주회를 꼭 갖자고 다짐했습니다. 연주회가 열리는 날 우리는, ‘어울림’으로 충만했던 그날 밤을 또다시 추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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