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jpg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937년 6월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던 시기 인천의 만석동에 광산용 기계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조선기계제작소가 설립됐다. 일본은 1930년대 불어 닥친 세계대공황을 타개하고 유동성 확보를 위해 대대적으로 금광 개발에 주력하는 산금(産金)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도 1937년 산금 5개년계획 정책을 시행하면서 식민지 곳곳을 파헤칠 채굴기를 비롯한 각종 광산용 기계가 필요했다. 광산기계제조업의 육성은 조선 내 금속자원개발 특히 금 생산의 증강을 위해 가장 시급한 전제조건이었다.

 일제는 식민지를 최대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조선에서 사회간접자본이나 생산 시설 투자를 최소한으로 억제했으나, 전쟁이 확산되면서 1930년대 후반에는 무기와 관련된 철강, 금속, 주물, 기계 등 공업으로 전환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일제는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2년 뒤인 1939년에 부평에 일본육군조병창을 건설했다. 전선에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데 있어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가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무신을 만드는 공장은 군화를, 의복을 만드는 공장은 군복으로 변모케 하는 등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했다.

 1943년은 제2차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된 해로, 일본은 광대해진 점령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고 미군의 공격에 수많은 수송선들을 잃었다. 당시 전쟁에서 일본 해군은 육군을 상륙까지만 책임지고, 육군은 보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는데 식량처럼 현지에서 수탈할 수 있는 물자도 있었지만 탄약을 비롯한 상당수의 군수품은 본토로부터 보급되는 것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 역시 해상에서의 전세가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급품 수송에 관한 육군의 요청을 번번이 거부하기 일쑤였다.

 육군과 해군의 반목은 도를 넘게 됐고, 이러한 해군의 비협조와 견제에 따라 일본 육군은 스스로 수송선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전대미문의 ‘보급품 수송’을 위해 ‘잠수정’을 제작하는 것으로 결론을 도출했다. 당시는 군의 최고기밀에 해당하는 극비계획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에 조선소는 많았지만 해군 물량을 소화해 내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육군은 부득이 히타치, 안도, 일본제강소 등과 계약을 맺었지만 기관차와 대포제작 공장, 철공소 등이었다. 여기에 인천에 있던 조선기계제작소를 추가시켰다. 모두가 조선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초대형 욕조나 수영장처럼 만들어 배가 완성되면 도크에 물을 채워 배를 바다로 빼내는 드라이도크를 갖춰야 했다.

 조선기계제작소에서 건조한 잠수정의 기술적 명칭은 ‘삼식잠항수송정(三式潛航輸送艇)’으로 ‘수송(輸送)’의 일본식 발음인 ‘유소’의 앞 글자를 원 안에 넣은 형태의 표식()을 사용했고 ‘마루유’라고 불렀다.

 유3001번부터 유3010번까지 총 10대의 주문이 들어갔는데, 이들은 모두 같은 도면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서로 큰 차이가 없었다. 첫 번째 ‘마루유’는 1944년 4월 착공해 불과 4개월 만인 8월에 준공, 진수했다. 각종 원자재 및 부품 조달은 당연히 열차로 연결되던 부평 육군조병창의 지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육군의 잠수함은 오로지 수송이 목적이었으므로 어뢰발사관 등을 제거해 최대한 단순화했고 일반 잠수함의 ½ 수준이었다. 승무원의 거주공간을 최대한 줄인 만큼 적재량을 최대한 늘렸고 가능한 목재를 사용해 레이더 탐지기에서 감지되는 위험도 감소시켰다. 출력은 낮았어도 가솔린뿐만 아니라 경유, 등유, 콩기름까지도 사용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잠수정이 보급한 물자는 모두 합해 100여 t에 불과했다고 하니 한마디로 비효율의 극치였던 것이다.

 일본 육군과 해군의 헤게모니 싸움은 오히려 상대 적국을 돕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해군의 육군에 대한 무시, 육군의 기상천외한 결정은 결국 만석동에서 한국 최초의 잠수정을 탄생시킨 요인이 됐다. 조선기계제작소는 광복 이후 한국기계, 현대양행, 대우중공업을 거쳐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으로 지금까지 계속 가동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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