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각종 건어물들이 정겹다. 말린 생선부터 쥐포, 생선머리, 오징어 다리까지 선반을 차곡차곡 메운 모양새가 주인장의 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대형 마트에 가면 어느 한 코너에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을 법한 물건들이 이곳에서는 주인공이다. 단골들은 여느 때처럼 이곳에 들러 주인장에게 좋은 물건을 추천받는다. 엄마의 손을 잡고 우연히 길을 지나던 아이들에게 생선머리만 가득 담긴 비닐봉투는 낯선 구경거리다. 한참을 구경하다 돌아서는 아이의 손에는 먹기 좋게 잘린 오징어포가 들려 있다.

 배다리가 금싸라기 땅이던 시절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신상회’의 모습이다.

인천시 중구 용동에 위치한 용신상회 전경.
# 용신상회의 시작

 1930년대 인천 배다리 인근은 ‘금싸라기 땅’으로 불렸다. 청과물 가게가 전성기를 누리면서 ‘참외전거리’로 불렸던 이곳에는 과일 장사 못지않게 건어물 장사도 호황이었다. 가게를 내기 위한 자릿세도 꽤 비쌌던 덕분에 인근 주민들은 "이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 부자들"이라고들 했다.

 이곳에는 건어물을 취급하는 상회들이 빼곡했다. 당시에는 꼭두새벽부터 부지런히 서울로 가서 건어물을 떼어 오는 트럭들이 매일 가게별로 한 대씩 들어갔다. 지금으로 따지면 한 대에 적어도 3~4일은 장사할 수 있는 물건이 차 있었다. 매일 한 트럭씩 들어갔으니 얼마나 호황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소래포구나 만수동은 물론 남대문시장이 없던 시절 서울에서도 이곳으로 와 건어물을 떼어 갔다.


 이 시기 셀 수도 없던 상회들 틈에서 용신상회도 문을 열었다. 창업주의 고향이 용인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용인상회’라는 상호를 내다 걸었다. 주로 생선 등 건어물을 취급했는데, 소가 끄는 마차로 인천뿐 아니라 김포까지 물건을 실어다 줬다. 당시 서울역 바로 맞은편에 남대문 어시장이 있었는데, 그곳 상인들도 이곳에서 좋은 물건을 받아 가기도 했다.

 창업주의 장녀였던 이기임(101)씨는 10대 소녀 시절부터 상회로 와 직원들의 밥을 지어주며 일을 도왔다. 그러다 결혼한 후에는 아예 남편과 함께 아버지에게서 운영을 물려받았다. 용인상회의 2대 대표가 바로 이 씨의 남편인 이병묵 씨다. 그러다 이 씨의 아들인 고(故) 이용기(1942~2017)씨가 1965년 3대 대표로서 가업을 이었다. 이때 상호도 용인상회와 ‘믿을 신(信)’자를 합쳐 ‘용신상회’로 바꿨다.

 # 수십 년간 어깨 너머로 배운 자부심

 용신상회에는 고 이용기 대표와 함께 3명의 직원이 있었다. 4명이서 일을 나눠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일상이었다. 이기임 씨는 혹시라도 이들이 끼니를 거르지 않을까 걱정돼 아들에게 상회를 물려준 후에도 가게에 나와 밥을 지어줬다.

▲ 황현구 용신상회 사장이 노끈을 걸어놓는 나무걸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4대 대표로서 현재 용신상회를 이어가고 있는 황현구(64)대표는 당시 용신상회에서 일하던 3명의 직원 중 한 명이었다. 1986년 2월 처음 배다리로 건너와 건어물 장사를 배웠다. 하루 장사를 위해서는 매일 오전 3시에 일어나 서울 가락동 등으로 넘어가 건어물을 떼어 와야 했다. 당시 양미리와 코다리 등이 가득 담긴 상자를 옮겨 왔는데, 지금처럼 종이상자가 아닌 나무 궤짝에 40코씩 담겨 있어 무게가 상당했다. 이 때문에 차가 이동하던 중 혹시라도 상자가 한쪽으로 쏠리면 차를 세우고 물건을 모두 내려 다시 제대로 쌓아야만 출발할 수 있었다. 건어물 장사가 호황인 만큼 경쟁도 치열했기 때문에 이런 날은 아찔한 기억이다.

 황 대표는 "당시에는 도매상들이 여럿 있다 보니 가게에서 떼어 온 물건을 빨리 펼치는 사람이 무조건 먼저 손님들을 맞는 거였다"며 "상회가 셀 수 없이 많아 단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부지런한 가게가 더 빨리 물건을 팔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현금보관함.
 황 대표는 용신상회에서 잡일부터 시작해 조금씩 노하우를 몸으로 익힌 전문가다. 어깨 너머로 터득한 노하우는 물론 고 이용기 대표가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어느 시기에 어떤 생선이 가장 많이 나오는지, 언제 나오는 물건이 가장 좋은지 등의 조언도 해 줬다. 이 때문에 고 이용기 대표의 건강이 악화됐을 때는 상회 일을 총괄해서 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정식으로 가게 운영을 물려받았다. 현재 용신상회 내 간이 사무실부터 선반, 노끈 틀까지 모두 제작했을 정도로 황 대표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황 대표는 지금도 손님이 원하는 물건이면 무엇이든 싼 가격에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수십 년간 몸으로 익힌 노하우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용신상회에 이미 있는 신선한 물건은 물론 간혹 희귀해서 평소 잘 찾지 않는 물건들까지 주문이 들어오면 무조건 제공하고 있다. 그 덕분에 지역 내 유원지 곳곳에서 파는 각종 쥐포와 오징어 다리 등도 30여 년째 용신상회 몫이고, 전통시장이나 일반 손님 등 단골들의 발길은 아직도 이어진다.

 # 동인천역 상권의 부활을 꿈꾸며

▲ 곡식의 양을 측정하는 되.
 대형 마트와 반찬 전문점의 등장, 학교급식 보편화 등은 지역 전통시장의 침체기를 불러왔다. 전통시장의 하락세는 곧 시장에 물건을 대주는 상회의 쇠퇴로도 이어졌다. 셀 수 없이 거리에 들어서 있던 상회들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손에 꼽힐 정도만 남아 있다. 서울 도매상들도 장사가 잘 되지 않다 보니 소래포구 등 인천으로 직접 내려와 장사하고 가는 일이 늘었고, 이는 용신상회를 비롯한 다른 상회들에 타격을 줬다. 다행히 오랜 기간 한 자리를 지킨 만큼 기존 거래처 등 단골이 어느 정도 남아 있어 운영은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호황기에 비해 지금은 매출이 현저히 줄었고, 그저 가게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다.

 황 대표는 "당연히 30~40년 전에 비하면 상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라졌고, 소매 손님들만으로는 가게를 이어 나가기 힘든 것이 사실"이라며 "시장도 전체적으로 불경기라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위기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황 대표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간다. 예전처럼 매일은 아니라도 2~3일에 하루는 새벽같이 서울로 가 상태가 좋은 물건을 가져오고, 이를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정리한다. 오전 7시 30분부터는 물건을 진열하는 등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매일 들어오는 주문을 받아 바로 배달을 나간다.

 황 대표는 "몇 년을 더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장사하는 동안 동인천역 등 주변 상권이 한 번은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올해로 34년째 건어물 장사를 하고 있는 만큼 문의를 주시면 어떤 품목이든 양질의 것으로 싼 가격에 구해 드릴 수 있으니 상회도 많이 찾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웃었다.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사진=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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