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각각 의원총회를 열고 ‘선거법 개편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에 대한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 합의안을 추인했다.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되면 상임위 180일, 법제사법위 90일, 본회의 60일 등 최장 330일 뒤에 본회의에 자동 상정돼 표결이 가능해진다. 이제 공은 특위로 넘어갔다. 정치개혁특별위원회(선거법 개편안)와 사법개혁특별위원회(공수처 설치법 등) 위원 수가 각 18명인데, 패스트트랙 지정을 위해선 11명(5분의 3)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공교롭게도 한국당 위원이 7명인지라 한 명이라도 이탈자가 생기면 패스트트택은 불가능하다.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바른미래당의 오신환(사개위)·권은희(정개위) 의원이 당의 방침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자, 당은 채이배·임재훈 의원으로 교체하며 불이 붙었다. 결국 바른미래당은 손학규·호남계 對 안철수·유승민계 간 내분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치닫고, 한국당은 특위 자체를 물리적으로 막는 과정에서 여야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 됐다. 이번 합의는 공수처 설치가 필요한 청와대·여당과 선거제 개편으로 의원수를 늘리려는 정의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결과다. 문제는 패스트트랙 안건이 국민의 지지와 명분을 얻기 힘들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점이다.

 우선 선거제 개편안은 (연동형) 비례대표를 늘리기 위해 지역구 의석을 225석으로 축소하는 ‘정치적 지각 변동’이 발생하는 사안이다. 여당이 이렇게 중차대한 안건을 ‘이해관계가 가장 큰 제 1야당과 합의하지 않은 건 절반의 국민 의견을 묵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출 계산법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점도 선거제도의 발전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공수처 설치법은 아예 본질 자체가 훼손됐다. 그동안 일어난 ‘게이트’급 국정농단은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 합의안을 보면 대통령 친인척과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이 공수처 기소 대상에서 빠졌다. 굳이 만들 필요가 있었는지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렇게 중요한 안건들을 서둘러 대충대충 끝냈을 때 그 후과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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